디지털울릉문화대전 > 울릉의 마을 이야기 > 저동마을 > 마을의 터줏대감 > 오징어잡이의 지존, 윤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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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생으로 북한에서 월남하였다는 윤병두. 저동에서는 한때 오징어잡이의 지존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이 배운 데에다가 성실하기가 그지없기 때문. 그는 해방이 되고 고향을 떠나 왔다고 한다. “북한 강계에 살았는데, 8·15 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어. 서울에 살다가…… 한때는 묵호에도 있었지. 울릉도는 그 뒤에 왔어. 묵호서 살다가 울릉도에 온 것은 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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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 그는 강원도 묵호에서 한 동안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양복점을 하였고 그 뒤 탄광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묵호에서는 양복점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지. 당시 강원도 부자들은 탄광을 했는데, 나도 시작하게 된 거야. 철원 탄광이었는데……. 그때는 박정희(대통령)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인데, (신청서가) 하루 늦어지는 바람에 들통이 났어. 대한석탄공사에 사업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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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세라는 나이에 울릉도로 온 그는, 바로 오징어 배를 타지 못했다. “당장 할 게 있어야지. 저동에서 노가다도 하고, 방파제 공사도 하고…….” 오징어배를 타게 된 것은 저동에서 어느 정도 낯을 익히고 난 다음이었다. 처음 배를 탔을 때는 멀미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멀미를 많이 했죠. 빙글빙글 돌고, 토하고……. 한 보름동안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하고 참았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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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두 씨는 자녀교육에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잡아야 해. 애들도 내 배운 만큼은 해줘야 해. 아버지 노릇 할려면 내가 고등학교까지 배웠으면 애들도 고등학교까지 배워주어야 해.” 방탕한 생활에 곁눈질 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그는 선주나 선장에게 인정을 받았다. 자신의 이야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어줄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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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동이 어업전진기지로 각광을 받을 시기, 보다 큰 규모의 오징어배는 약 한달 정도 바다에 머문다고 한다. “한 30년 전에 45톤짜리……, 대화퇴 소련 앞바다까지 가서 밤새워 오징어를 잡곤 했어. 그 배에서 4년 탔는데, 일등은 두 번밖에 안 놓쳤어.” 한 달 동안이나 바다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 생활은 말도 못하게 비참하다고 한다. 오징어는 특성상 밤에 잡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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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구가 저동인데, 저동은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야. 동해안 전체의 배가 오징어를 잡으러 이리 오곤 해. 오징어 철이 끝나면, 포항에 날나리를 만들 재료를 사러 가지. 파는 것이 없어서 직접 만드는데, 빙글빙글 거리면서 까닥까닥 거리기에 날라리라고 하지.” ‘날나리’. 그는 그것을 직접 만들었단다. 그리고 아무런 뜻도 없이 그냥 ‘날나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날라리’는 오징어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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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가 주선해주면 선장이 하고, 선장이 교회 장로나 교회를 다니면 하지 않지. 그래도 불교 신자들은 거의 빌어요. 제물로는 돼지머리도 삶고, 떡도 하고, 부침개도 하고, 어물도 하고……. 그것도 제법 돈이 많이 들어요.” 출항을 하기 전에 지내던 기원제에서는, 선원들의 안전을 주로 빌었다고 한다. “지금은 해경이 감시하고 있어……. 3, 40년 전에는 그런 거 없었어요.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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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묻힐려고. 편하게 나 혼자 여기 있는 게 제일 좋아. 할멈은 없어. 자식네 아파트에 가면 창살 없는 감옥이야. 울릉도는 돈이 거의 안 들어. 교통비도 안 들어. 애들 공부 끝내고 모아둔 돈으로, 나 혼자 먹고 지내고, 또 아들딸이 보내준 돈도 있고…….” 윤병두, 그는 저동이 동해안 어업전진기지로 활기찬 발전을 거듭할 때 조업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산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