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울릉문화대전 > 울릉의 마을 이야기 > 도동마을 > 도동마을 사람들 > 동백꽃 피는 울릉도, 떳떳하게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이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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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나서 잠깐 쉬어 가는 순간이라들 하지만 짧은 기간이라도 시대를 잘 타고나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내 땅을 가지고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피땀 흘려 지은 곡식도 내 마음대고 먹지 못하는 1944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라 농사를 지어 놓으면 모두 공출로 다 바치고, 다시 배급을 타서 인명을 이어가야 하니 농촌에서는 가축이라도 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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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며 밥투정이나 하면서 지내야 할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배운 말이란 우리나라 말이다. 형님 덕분에 학용품 이름 몇 개 정도는 근근히 일본어로 할 수 있어서 초등학교 1학년 면접시험에는 합격이 되어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가까운 이웃에서 입학한 친구는 용수, 복수, 정덕, 여자 친구 남순이와 다섯 사람이었다. 망아지처럼 온 들판을 뛰어 놀다가 갑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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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되어 우리말의 제재는 받지 않아, 마음 놓고 학교를 다녔다. 학교 어느 곳에서나 일본의 지배를 받고 살던 터라, 우리글로 된 초등교과서 한권 없이, 심지어 국어교과서도 선생님께서 가지신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칠판에다 적어서 그것을 읽고 뜻을 풀이하고, 수학은 선생님께서도 책이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제를 칠판에 적어 풀이하며 가며 간신히 초등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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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교육과정을 배우는 둥 마는 둥 하고 졸업을 하는 바로 그 해에 학원으로 이어져 오던 고등학교 과정의 학원이 울릉수산고등학교로 인가를 받고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일찍이 형님은 분가하여 북면사무소에 근무하시고 집에는 연세 높으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였고, 밑으로 여동생 셋과 남동생 한 명이었다. 집에서는 내가 상일꾼 노릇을 해야 했다. 중학시절부터 소 몰고 밭을 가는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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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학교 진학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허락도 중요하지만 형님의 허락을 받아야하기에 천부에 있는 형님 댁으로 찾아갔다. 형님을 뵙고 나는 비장한 각오의 말씀을 드렸다. ‘형님, 아주 불량한 동생을 하나 두었다고 생각하시고 한 달에 막걸리 4되, 건설 담배 30갑을 태운다고 보고, 그 금액만큼만 저를 도와주시면 3년 동안 술은 물론이고 담배 한대 안 태우고 졸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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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께서 매달 2,200환의 도움을 주시기로 하였으나 그 당시 행정공무원의 봉급으로 조카들 양육비며 살림살이에 나에게까지 신경 써줄 겨를이 없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하더라도 시작을 하였으니 끝은 맺어야 하겠고 매달 800환의 등록금 마련이 나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다 자취생활을 하는데 식량은 집에서 옥수수라도 가져다 먹어야 되는데 밥을 해 먹을 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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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에 9월 1일자 교원발령 나자마자 동네 처녀 얼굴도 한번 못보고, 말 한마디도 못해보고 결혼했습니다. 한번은, 북면 면사무소에 형님이 오랫동안 근무하셨는데, 면장님 모시고 현포를 방문하실 때 면장님이 어린 나이에 농사일을 거들고 열심히 움직이는 저를 보고 마음에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면장의 여동생이 저와 동갑이라며 제매 삼겠다고 했었습니다. 형님도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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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교직에 들어 와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였는데, 3년여 만에 본의 아니게 직장을 잃어버리니, 이제는 혼자 몸도 아니고 벌써 가족이 셋이나 되어 살아 갈 길이 막막하였다.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되는 것은 농토가 있어 땀 흘려 노력하면 식생활 해결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남양을 떠날려니 신학기 들어 새로 맡은 6학년 어린이 43명을 맡을 담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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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수 봉사활동으로 5년에 가까운 세월을 고향 농촌의 부흥을 위하여 나름대로는 전력을 다하여 몸 바쳐 왔으나 나 개인을 위해서는 무의미한 생활이었다. 보수라고는 고작 농협에서 정해져 내려오는 생활필수품 그것도 이율이 0.5%도 되지 않는 그 이익금뿐이었다. 마침 이때 자격증을 가진 교사들의 순위고사를 본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 수의를 해서 본래 뜻하였던 교직으로 되돌아 갈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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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고 고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남들은 울릉도를 외딴 섬이고 교통이 불편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들 할지 모르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곳이다. 그래서 나는 칠순에 가까운 오늘까지 이 땅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내 고향 울릉도는 보물의 섬이요. 낙원의 섬으로 변모되어 찾는 사람들의 수는 매일같이 증가하는 추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