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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500672
한자 洪淳七
영어음역 Hong Sunchi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릉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우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용군
출신지 경상북도 울릉군
성별
생년 1929년 1월 23일연표보기
몰년 1986년 2월 7일연표보기
대표경력 근무공로훈장[1996]|보국훈장 삼일장[1996]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 출신의 독도의용수비대 대장.

[활동사항]

홍순칠(洪淳七)은 1929년 1월 23일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홍재현(洪在現)이 1883년(고종 20) 4월에 강원도 강릉에서 울릉군 지역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홍재현이 울릉군 지역에 자리를 잡을 당시에는 두 가구만이 울릉군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홍재현과 관련하여 전하여 지는 일화가 있는데 1897년 6월 높은 산에 올랐다가 독도를 발견하곤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 그루를 가져가서 심었다.  다음 해인 1898년에 독도에 갔다가 일본인 무라카미[村上]를 만나 일본까지 동행하여 일본인의 독도 출입을 금지할 것을 당부한 무용담이 전하여 지고 있다.

홍순칠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국군에 입대하여 함경북도 청진(淸津)까지 진격하였으나, 원산 근처에서 전상을 입고 1952년 7월 특무상사로 전역하였다.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왔을 때 울릉경찰서 마당 한 쪽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이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 표목은 일본이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며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는데 이에 대한 확인 표목이었던 것이다. 홍순칠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후 독도를 지키고자 결심하였으며, 1952년 가을에 부산으로 가서 무기 등 장비를 구입하였다.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도의용수비대의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이었다. 이 가운데 3명을 빼고는 모두 6·25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이었으며,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은 홍순칠이 맡았다. 독도의용수비대 조직 시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중기관총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톤 보트 1척 등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 1953년 4월 20일에 홍순칠독도의용수비대독도에 도착하여 경비를 시작하였다. 독도의용대는 1953년 6월 독도로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하도록 조치하였으며, 1953년 7월 23일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총격전을 벌여 격퇴하였다. 그 후 체계적인 독도 수호를 위해 박격포를 구입하는 등 장비를 보충하였다. 1953년 7월에는 국회에서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관을 경비대로 독도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비임무를 맡은 인원은 5명뿐이었고 상주를 위한 숙소는 독도수비대에 의존하였으며, 준비된 장비는 칼빈 소총 한 자루와 약간의 식량, 간장, 된장 그리고 소주 몇 상자뿐이었다. 1953년 8월 5일에는 독도동도(東島) 바위 벽에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밝히는 ‘한국령(韓國領)’을 새겨 넣었다.

1954년 11월 21일에는 1천 톤급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함 PS9, PS10, PS16함이 비행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였으며, 독도의용수비대와 경찰 경비대의 항전으로 일본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 각서를 제출하고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켰으며, 일본해상 보안청의 함정은 매달 정기적으로 20일에서 24일 사이 출현하였다.

이에 홍순칠은 대책을 마련하고자 주위에 도움을 청하여 경상북도 지사로부터 구호양곡을 도움받기로 하였으나, 미군 고문관 소령은 한국과 일본이 서로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독도분쟁에 미국의 식량을 사용할 수 없다며 구호양곡의 지급을 거절하였다.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기도 구하기 어려워지자 홍순칠은 가짜 대포를 생각 해냈다.

포구 직경이 20㎝ 정도이고, 포신이 자유롭게 돌며 에나멜로 단장하여 실제 대포로 보이는 목대포를 설치하였다. 목대포는 후에 일본에서 발간된 『킹』이란 월간지에 「독도에 거포 설치」라는 기사까지 나게 할 정도로 진짜 같았다. 목대포를 설치한 후 일본 측 함정이 나타났지만 그전처럼 근접하지는 않고 먼 곳에서 배회만 할 뿐이었다. 목대포는 독도의용수비대가 1956년 12월 30일 정부에 독도 수비를 인계할 때까지 일본 함정과의 총포전을 막아준 큰 역할을 하였다.

1956년 12월 30일 홍순칠과 마지막까지 남은 독도의용수비대 32명은 무기와 독도 수비임무를 경찰에 인계하고 3년 8개월 만에 울릉도로 돌아갔다.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은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도에서 10년 동안 탐수 작업을 벌여 1966년 9월 식수를 발견하여 수조 탱크를 설치하고 독도 근해에 출어하는 어민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1983년 6월에 독도 정상에 대형 태극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1986년 2월 척추암으로 57세에 별세할 때까지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을 펼치는 등 독도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잡지에 연재했다가, 사후인 1997년 출간된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6년에는 5등 근무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96년에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최** 감사합니다. 학교 숙제로 이용하겠습니다
  • 답변
  • 디지털울릉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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