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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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橘眞重 |
영어음역 | Dachibana Masashi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조선 중기 대마도사정관으로 활동한 일본인.
[개설]
1693년(숙종 19) 안용복 등의 40여 명의 어부가 울릉도 해역에서 돗토리현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졌고, 안용복 등은 일본의 오오야가[大谷家] 어부들에 의해 오키시마[隱岐島]로 납치되어 갔다. 이때 안용복은 그곳에서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들어 구금 납치의 부당성을 도주(島主)에게 따졌다.
안용복의 항의를 받게 된 도주는 상관인 돗토리현 태수에게 이들을 이송시켰으며, 사건을 보고받은 태수는 당대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에도 관백(關白)에게 보냈다.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 땅이 아니므로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막부의 서계(書啓)를 써주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안용복을 사정관 다치바나 마사시게로 하여금 조서에 호송하게 하고 죽도에 대한 영토 문제를 제기하였다.
[활동사항]
안용복 사건이 처음 일어나자 대마도도주는 이 사건을 역이용하여 자기가 막부정권을 대신한다고 전제하면서 대마도 사정관(使正官)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시켜 안용복과 박어둔 등을 부산에 호송하는 길에 조선 측에 서찰을 보내 마치 울릉도가 아니면서 그와 비슷한 별개의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가 있는 것처럼 문구를 만들어 “이제 이후로는 죽도(竹島)에 조선 선박이 출어하는 것을 절대 용납지 않을 터이니 귀국도 엄격히 금지하여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1693년(숙종 19)에 강경 대응론과 온건 대응론이 대립하다가 당시 좌의정 목래선(睦來善)과 우의정 민암(閔黯) 등이 주장한 온건론이 채택되어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인 것만 분명히 밝히고 일본인들이 일본의 영토라고 서찰에 쓴 죽도가 울릉도를 가리킨 것임을 모른 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예조를 시켜 부산왜관에서 답서를 기다리는 다치바나 마사시게를 통해 대마도주에게 회답문을 보냈다. 이때 다치바나 마사시게는 회답문 속의 ‘우리나라의 경지(境地) 울릉도(鬱陵島)’란 말의 삭제와 개서(改書)를 요구하다가 조선 정부가 끝까지 들어주지 않자 회답문을 접수해 귀환하였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강경론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숙종은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지난번 회답문을 취소하여 회수함과 동시에 새로운 회답문서를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1694년(숙종 20) 8월 새로운 회답문을 작성하였으며,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죽도라고도 칭하며 이것은 1도 2명(一島二名)이 있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죽도가 울릉도로 조선의 영토임을 밝히었다. 이에 대마도도주는 다치바나 마사시게를 다시 동해로 파견하여 조선이 죽도를 울릉도라 하여 조선의 영토라고 고집하여 조선인의 일본 영토인 죽도로의 왕래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큰 병란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조선의 확고한 방침과 대마도에 새 도주(島主) 소요시미치[宗義方]이 들어서고, 막부 또한 죽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하여 죽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지자 그간 대마도와 조선을 오가면서 울릉도 문제의 외교문제를 교섭하였던 다치바나 마사시게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