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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160
한자 玉洞里
영어공식명칭 Okd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개설
옥동리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5.735㎢
가구수 159가구
인구[남/여] 327명[남자 156명|여자 171명]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에 있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옥동리(玉洞里)는 옥연이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이 옥매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옥동리의 옥과, 마을 중앙이 제비집을 닮았다 하여 제비 연(燕)을 붙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황원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삼호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옥동마을, 옥연마을, 삼호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옥동마을의 입향조는 조선 현종 때인 1654년경 고산 윤선도의 증손 윤광서가 해남읍 연동에서 들어왔다고 전한다. 옥연마을은 옥동마을과 한 동네였으나 1952년에 분리되었다. 옥연(玉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이 있어 ‘농장’이라 불리던 곳을 해방 후에 일본식 명칭을 없앤다 하여 옥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삼덕포 제방을 막아 농장을 만들면서 형성되었으며, 1940년쯤 일본 한전화학회사가 옥매산을 개발하면서 각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온 사람들에 의해 마을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1884년에 들어온 유인방이 입향조이며, 1915년경 유흥선이 들어왔다고 한다. 삼호마을은 옥매산 부근에 고인돌도 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 해남현 조에 삼기원(三岐院)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초 입향은 1690년경 제주양씨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삼덕포 간척지와 옥동 간척지가 조성되고 이후 옥매광산이 개발되었다. 옥매산은 일제감정기에 명반석 광산으로 개발되면서 수십억 톤의 납석과 명반석을 캐내던 광산이었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 강제 동원되었던 옥매광산 노동자들 118명이 1945년 8월 23일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몰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자연환경]

마을 앞으로는 바다가 길고 넓게 펼쳐져 있다.

[현황]

옥동리(玉洞里)는 북쪽으로 관춘리, 문내면 용암리, 문내면 학동리, 동쪽으로 관춘리, 부곡리, 남쪽으로 부곡리, 바다, 서쪽으로 문내면 학동리, 바다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5.735㎢이고, 옥동리, 옥연리, 삼호리의 3개 행정리에 159가구, 327명[남자 156명, 여자 17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생업은 농업으로 주로 쌀농사를 짓는다. 농업용수로는 관춘제와 옥동저수지 물을 사용한다. 고기잡이를 하거나 소규모 전복 양식도 한다. 옥연마을에는 상가가 밀집하여 있으며, 옥가공 공장이 있다. 오른쪽 위로 국도 제18호선이 살짝 걸쳐 지나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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