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69
한자 海南-
영어공식명칭 Heanam People Who Keep Ganggangsulla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변남주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강강술래를 지키려고 애쓰는 해남 군민들의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강강술래 기록]

전라남도 해남에서 강강술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민속놀이이다. 일제강점기에도 강강술래는 서남해 연안에서도 큰 마을인 해남 우수영에서 매우 성행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출간된 잡지 『별건곤』제9호에는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강강술래와 관련하여 ‘팔도 전설 순례’라는 연재 기사의 하나인 「해녀와 용사의 부부암」이 실려 있다. 시인 김동환(金東煥)이 쓴 그 기사에 따르면, 강강술래가 명량대첩의 승전 요인이었고, 강강술래라는 호칭은 원래 강강수월래[强强隨月來 또는 强强水越來]이며 그 뜻은 ‘강한 적군이 달 따라 또는 바다 물을 건너 침범하니 나가 싸우자.’인데 이순신 장군이 지었다고 한다. 또 강강술래가 우수영에서 발원하여 호남은 물론이고 영남까지 유행하게 된 까닭을 전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 전설은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봉녀와 정남은 연인 사이였는데, 명량해전 당시 봉녀는 육지에서 강강술래를 하고 정남은 해전에 참여하여 승리하였다. 정남을 애타게 기다리던 봉녀는 정남을 만나러 바다로 나아가 가까스로 해후하였으나, 둘은 만나자마자 울돌목의 파도에 휩쓸려 결국 죽고 말았다. 둘이 죽고 난 이튿날 바닷가에는 바위 두 개가 솟아올랐다. 이름하여 ‘부부암’ 또는 ‘봉녀바위’, ‘정남바위’라 칭하였다. 그런데 어느 어부가 ‘부부는 무슨 부부냐?’ 하면서 ‘형제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더니 이튿날 바위 하나가 슬펐던지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장사를 지내고 제사 때마다 남녀노소가 당시와 같이 강강술래를 하였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두 사람의 혼을 달래려고 전라도나 경상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매년 가을철이 되면 강강술래를 하게 되었다.”

이 기사는 당시 해남 지역에 떠도는 전설이나 민담을 취재하여 허구를 섞어 가공한 것인데,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용병술에서 기원하였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중앙일보』 1934년 8월 24일 자에서도 해남 강강수월래를 명량해전 관련설로 소개하려 하자 일제의 사전 검열로 기사가 삭제된 바 있다.

[김금자, 강강술래는 내 인생의 전부다]

김금자(金今子)[1938~]는 우수영이 있던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보름달이 뜨면 우수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날이 새도록 놀았다. 당시에 처녀들이 밤에 놀러 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대보름한가위만은 허락되었다. 우수영 처녀들은 사흘 밤을 지새워 놀고 나면 발에 병이 나서 더 나가 놀라고 하여도 문턱을 못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이 되자 우수영에서 김금자를 비롯한 30여 명으로 강강술래 공연단을 조직하였다. 공연단은 단장으로 문내면 동외마을 정채옥을 선임하고 목포 등지에서 공연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공연단 활동에는 제중의원을 운영하던 김범진의 후원과 지도가 절대적이었다. 김금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강강술래에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에 관련한 사설을 넣게 된 것도 우수영 문화에 애정이 깊었던 김범진이 이은상 시인의 충무공 시를 주면서 강강술래 가사로 만들어 부를 것을 권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957년 공연단으로 여성 37명이 참가한 우수영강강술래를 명량해전 전승 36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사직공원에서 공연하여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1958년 김금자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음에도 강강술래 재능을 인정받아 당시 전라남도 광주시의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강강술래 특기 장학생으로 뽑혀 재학 기간[1958~1961년]과 졸업 후 2년 동안 강강술래를 지도하였다. 1961년에는 전라남도 대표로 서울특별시의 덕수궁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경복궁, 진해 해군사관학교 등에서도 강강술래 공연활동을 하였다. 김금자가 1963년부터 3년간 해남군청에 근무하게 되자 해남 우수영에는 다시 강강술래단이 구성되었다. 1963년 10월 전라남도 대표로 서울 창덕궁에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1964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1966년에는 단체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 당시 한 신문은 김금자를 프리마돈나로 칭하기도 하였다.

김금자는 이러한 재능과 공로를 인정받아 28세이던 1966년 2월 21일 해남의 김길임(金吉任)[당시 38세], 진도의 양홍도(梁紅道)[당시 68세]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지금의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지정 사유는 민족 전래의 고유 오락이며 민요인 동시에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민족적인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데에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교[현 중앙대학교]의 임동권 교수가 강강술래 우수영 현지 조사를 나왔을 당시 함께 온 남학생을 김금자와 중매하여 김금자는 1967년 3월 25일 결혼하고 1967년 11월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이때 서울 이주를 사유로 1971년 예능보유자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보유자에서 해제되었지만 그 후 50여 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광명시 등에서 해남의 강강술래를 전파하였다. 1968년에는 서울특별시에 있던 전 우석대학교 무용과 학생을 지도하였고, 1970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무용과 학생을 지도하였다. 또한 문내재경향우회 강강술래 팀을 조직하였는데, 김석만이 단장을 맡았고 김금자가 지도하였다. 문내재경향우회 강강술래 팀은 금방 유명세를 타서 고향인 해남에서 열리는 강강술래 행사나 군민의 날에도 자주 초청되고 있다.

[전국에 알려진 우수영 강강술래]

우수영 강강술래는 1975년과 1976년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놀이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려고 지춘상(池春相)[1932~2009] 전남대학교 교수가 기존의 강강술래에다 일곱 개 놀이를 보태어 대회용으로 각색한 것이다. 당시 김길임[1927~1999]과 박양애[1935~2018]가 설소리를 하고 전라남도 진도 출신인 박병천이 장단 실기 지도를 하였다. 연습은 우수영국민학교에서 밤에 진행하였으며 담당은 문내면사무소 부면장 김장수가 맡았다. 어느 날 지춘상이 일이 있어 일본에 다녀오는 동안 박병천이 강강술래를 지도하였는데, 진도 지역에서 전래하는 연행 동작인 손치기, 발치기, 개구리타령 등을 가르쳤다. 지춘상이 귀국하자 우수영 측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였고, 지 교수는 진도의 것을 보태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진도 것은 제외하고 우수영 지역의 전래 놀이로만으로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기존 형식, 즉 원을 그리며 추는 춤에 덕석말이, 남생이놀이, 고사리꺾기 등을 놀이하는 강강술래에다가 새롭게 청애엮기, 청애풀기, 지와밟기, 쥔쥐새끼놀이, 꼬리따기, 문지기놀이, 가마타기 등을 보태고 공연 인원도 100여 명으로 대폭 증원하였다.

대회 직전에는 우수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석 달간을 집중하여 불을 켜고 연습하였다. 그 결과, 1975년 서울에서 열린 제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설소리꾼 박양애는 남편이 오랜 병환으로 사경에 이른 때라 불참하려 하였으나 남편이 대회에 나갈 것을 권하여 나가게 되었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돌아오자 남편은 “고생했네.” 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어 우수영 강강술래는 1976년 9월 진주에서 열린 제17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우수영강강술래공연단 250명은 1977년 광주 58회 전국체육대회의 식전 행사에 초청되어 시연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수영 강강술래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고 전국적인 행사인 1978년 춘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1980년 덕수궁 마당놀이 공연 등에도 초청되었다.

[보유자 승계와 해남강강술래전수관을 통한 보존·전승 노력]

한편, 진도의 강강술래 예능보유자로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양홍도가 기능을 전수하지 못한 채 1971년 사망하게 되자 양홍도제 강강술래는 소멸되고 말았다. 1974년 진도문화원장 조담환은 진도민속놀이보존회를 창립하고, 1975년 해남에서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할 당시 설소리꾼을 맡았던 김길임 등을 초빙하여 자택과 진도문화원에서 진도 부녀자들에게 해남의 강강술래를 가르치게 하였다. 1984년 이후에는 진도군 성내리에 지어진 진도군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해남과 진도 부녀자를 통합하여 해남 강강술래를 전수·교육하였다. 진도군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은 1986년 문화공보부로부터 강강술래보존회로 정식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통합 전수 결과, 진도와 해남의 강강술래는 기본적인 구성이 똑같아졌는데, 김길임이 가마타기만은 가르치지 않아 지금도 진도 강강술래에는 가마타기가 없으며 진도 강강술래는 나중에 손치기, 발치기, 개구리타령, 밭갈이, 바늘귀끼우기 등을 독자적으로 추가하였다. 이러한 놀이들은 우수영 강강술래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가 아니라며 연행하지 않는다.

1999년 보유자인 김길임이 사망하자 2000년 박양애와 차영순이 보유자를 승계하였다. 강강술래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강강술래 전수교육조교와 우수영부녀농요 예능보유자를 겸하였던 이인자가 2015년 전라남도 문화재인 부녀농요를 선택하자, 해남에서는 강강술래 전수교육조교로 정순엽만 남게 되었다. 보유자 박양애는 오랜 지병 끝에 2018년 사망하였다.

한편, 해남군에서는 독자적인 해남 강강술래의 보존과 전승을 위하여 2003년에 지금의 사단법인 우수영강강술래·부녀농요진흥보존회를 설립하고 해남강강술래전수관을 울돌목에 준공하였다. 2005년 우수영강강술래·부녀농요진흥보존회 1대 이사장에 김효길을 시작으로, 2~3대 이사장에 문두식이 취임하였고 4대 이사장에 최성재가 2017년 취임하였다. 해남 강강술래는 지금까지 문내면을 비롯하여 화원면, 황산면 부녀자 140여 명을 대상으로 독자적으로 전승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문화재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