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64
한자 詩文學-海南-詩人-金南柱-高靜熙
영어공식명칭 Revolutionary Poet Kim Namju, Liberal Poet Go Jeonghui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경윤

[정의]

해남이 낳은 혁명 시인 김남주와 여성주의 시의 선구자 고정희의 문학세계.

[시문학의 1번지 해남]

광활한 들판, 그 들판에서 생산된 풍족한 쌀은 해남을 살찌웠다. 수려한 풍광은 많은 시인들로 하여금 해남을 노래하고 시대를 노래하게 하였다. 해남이 배출한 시인은 그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멀리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면 최부를 시작으로 윤구, 임억령, 윤복, 유희춘, 백광훈, 윤선도, 윤이후, 윤두서, 초의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윤선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시인이었다.

한국 현대문학 100년의 역사에서도 해남처럼 많은 시인을 배출한 고장도 찾아보기 힘들다. 해남을 일컬어 ‘시문학의 1번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해남이 낳은 시인을 보면 이동주[현산면], 박성룡[화원면], 박진환[마산면], 법정·박문재[문내면], 박건한·김봉호[해남읍], 윤재걸[옥천면], 윤금초·김준태[화산면], 노향림·최일환[산이면], 황지우·오영빈[북평면], 김남주·고정희[삼산면], 백추자[송지면] 등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해남에서 많은 시인들이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 해남의 문학 단체를 통해 살펴보자. 1950년대 해남에서는 두륜문학회가 결성되어 지역문학의 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1959년 9월 9일 지역문화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민재식, 이정훈, 윤상현, 이광정, 김남용 등이 모여 두륜문학회를 결성하고 지역문화 활동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1972년 1월에 이르러서는 희곡작가 김봉호를 중심으로 한듬문학회를 창립하였다. 3년 후 한듬문학회는 한국문인협회 해남지부로 개편되었다. 1980년대에는 남촌문학회, 해남문학회 등이 결성되어 해남의 지역문학을 꽃피웠다. 해남에 많은 시인들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해남 지역 문학 단체의 결성과 활동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는 1980년대 해남을 대표하는 시인 김남주(金南柱)[1946~1994]와 고정희(高靜熙)[1948~1991]의 시 세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혁명시인 김남주]

김남주는 철들면서부터 오직 제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았다. 청춘을 송두리째 군사정권 타도 투쟁에 바치고,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 자유와 해방을 위해 한 마리 거친 수말처럼 뛰어다녔다.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를 자처하였던 혁명가였으며, 인간성을 억압하는 온갖 비인간적인 이데올로기를 혁명의 순결성으로 맞받아친 전투적인 휴머니스트였다.

김남주가 시인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세칭 지하신문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감옥 체험과 농촌 현실을 노래한 시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김남주가 혁명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은 1978년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다. 김남주는 옥중에서 교도관 몰래 수많은 옥중시를 써서 비밀리에 유출하였다. 그 시들은 1980년대 우리 사회 변혁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되었으며, 1980년대 한국시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서 우유갑 안쪽에다 꼭꼭 눌러 쓴 김남주의 시편들은 운동권과 대학가에서 감동적으로 회자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김남주는 어느새 전설이 되었다. 김남주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김남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암울했던 시대, 김남주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김남주의 초기 시는 대부분 첫 시집 『진혼가』[1984]와 『나의 칼 나의 피』[1987]의 제4부를 이루고 있다. 초기 시들은 대체로 개인사적 경험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함성지 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수사를 받은 끝에 10개월의 옥고를 치른 경험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숙명처럼 지녔던 농촌 현실과 농민 문제에 대한 부채 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남주에게 시인과 혁명가로서의 삶은 남민전에 가입,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구속된 시기를 전후하여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김남주는 시인의 길보다 전사의 길을 택하였다. 그렇지만 전사의 길을 택한 것과 시 쓰기 행위 사이에 심각한 낙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남주의 시작(詩作) 행위 자체가 곧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김남주의 싸움은 해방, 민족 자주, 민중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고독한 전투이자 순정한 투쟁이었다.

김남주가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어 9년 3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쓴 약 360여 편의 옥중시들은 『나의 피 나의 칼』, 『조국은 하나다』[1988], 『사랑의 무기』[1989], 『솔직히 말하자』[1989] 제1부, 제2부에 실려 있다.

김남주의 ‘밥과 땅과 자유’를 향한 시인과 전사로서의 투쟁은 억눌린 자의 신음 소리가 아닌, 단호한 저항 정신이 깃든 적대세력을 향한 칼날이었다. 옥중시 계열의 작품에서 비로소 시인은 시와 혁명의 관계를 일치시켰으며, 그 관계는 시인이 직접 토로한 것처럼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시적 특징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 폭로’와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싸움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우회로를 타지 않고 곧장 핵심에 이르러 창작 의도를 분명히 보여 주려 하였기 때문이다.

10여 년 동안 김남주를 가두어 둔 감옥에서 나온 이후 쓰인 시들을 모은 『사상의 거처』에는 옥중시에서 보여 주었던 팽팽한 긴장과 날카로운 역설이 무디어지고 시의 호흡이 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 나이 벌써」, 「악몽」,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서」, 「길」 등은 출옥 후에 다가온 긴장의 상실과 함께 회한과 고뇌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시와 삶을 일상의 대지에 뿌리내리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의 시도 생활에 뿌리를 박고 그 뿌리가 세상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외롭고 힘겹게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는 이슬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시작 태도의 일정한 변화를 동반한다. 시인의 관념적 사유에 대한 자기반성은 곧 생활에 대한 재인식으로 나타난다. 시인이 자신의 경직성을 반성하면서 그동안 칼바람 같은 벼랑 끝에서 굳어 있었던 자신의 심장을 녹이기 위해 내려가는 곳은 다름 아닌 생활하는 사람들 속이었다.

1988년 12월 김남주는 국내외의 지속적인 석방 운동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구속된 지 9년 3개월 만이었다. 청년기 절반 가량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던 김남주는 1994년 2월 13일 감옥에서 얻은 병마에 시달리다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민중이 해방되기를 바라는 혁명의 노래를 남긴 채 그는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피로 쓴 언어의 화살’인 김남주의 시에는 ‘피 묻은 진실’이 담겨 있고, 아직도 김남주의 노래 「조국은 하나다」는 우리 민족의 슬로건으로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비록 김남주의 육신은 죽음으로 방부 처리되었을지 모르지만 김남주의 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 시사(詩史)에서 만나기 힘든 희귀한 정신의 결정체인 김남주의 시는 우리 문학이 자유와 평등과 해방의 이념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응시하지 않을 수 없는 등대불로서 저 멀리서 빛나고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 시의 선구자 고정희]

고정희 시인은 43세의 짧은 생애 동안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 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를 보이며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다 갔다.

시인은 비극적 오월의 봄에서 절망과 더불어 그 절망을 타고 넘을 열망을 뿜어 올리는 한(恨)과 그리움으로 “잘못된 역사의 회개와 치유와 화해에 이르는 씻김굿”을 통해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노래하였으며, 여성 민중의 삶과 수난을 노래한 「여성해방출사표」를 던지며 한국에서 페미니즘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하고 「밥과 자본주의」를 통해 여성 민중시의 언어적 실천과 성취를 보여 주었다.

고정희는 자신의 문학적 삶에서 ‘세 개의 행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광주와 수유리, 그리고 ‘또 하나의 문화’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시대 의식을 얻었고,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시절의 만남을 통하여 민중과 민족을 얻었고, 그 후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 민중에 대한 구체성, 페미니스트적 구체성을 얻게 되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고정희는 이 만남을 “분리가 아닌 상호 보완의 관계”로 바라보고 그 통일을 추구했던 시인이었다.

고정희는 1975년 박남수 시인에 의해 『현대시학』에 「부활 그 이후」, 「연가」 등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고정희는 1984년에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챤아카데미 출판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부터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고정희가 여성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또 하나의 문화’는 기존의 문화를 남성중심주의 문화로 규정하고 남녀가 평등하고 건강한 벗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며 대안적 문화운동을 표방한 단체이다. 사회학·인류학·여성학 등을 전공한 동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대안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데 의기투합한 고정희는 여성 문화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를 창간하는 데 개국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모아 둔 여성문제 자료를 바탕으로 ‘여성사 새로 쓰기’ 작업을 구체화하는 것도 이 만남을 통해서 결실을 거둔 것들이다.

1988년에는 여성문제를 대중매체를 통해 공론화하는 데 이바지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주간을 맡아 신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해냈다. 고정희는 이때 여성 억압의 다양한 현장들과 부딪치며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시작에 전념하였다. 고정희는 날마다 시를 쓸 짬이 안 난다며 투덜대면서도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다고 한다. ‘오늘 하루를 생애 최초의 날처럼, 또한 마지막 날같이’를 생활 지침으로 삼고 가열차게 살았다.

고정희는 1984년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이 되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며 여성주의문학에 대한 탐구와 여성해방의 시를 창작하게 된다. 고정희는 「한국 여성문학의 흐름」이라는 글에서 그동안의 문학사가 남성 시각 중심으로 왜곡, 왜소화되어 온 여성문학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고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고대문학과 1980년대 문학에 이르는 문학사를 여성 중심 시각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여성문화란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지배문화 혹은 가부장제 부성 문화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대안문화’를 의미하며 이 문제는 비평적 과제와 창작적 과제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지와 여성주의문학이 단지 성별 분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문화를 극복하고 참된 인간 해방 공동체를 추구하는 대안문화로서 ‘모성 문학’ 혹은 ‘양성 문학’의 세계관을 보여 주는 문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고정희의 시에서 여성문제가 본격적인 주제로 표출된 것은 『저 무덤 푸른 잔디』[1989]부터였지만, 『여성해방출사표』에 오면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이 좀 더 심화될 뿐 아니라 다양한 시적 방법론을 구사하게 된다.

고정희는 이 시집에서 남성중심주의적인 민중운동, 또는 인간 해방 운동이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해방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주시하면서 “그동안 나는 사회변혁 운동과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름대로 심각한 갈등을 겪어 왔다. 예를 들면 민중의 억압 구조에는 민감하면서도 그 민중의 ‘핵심’인 여성 민중의 억압 구조는 보지 않으려 한다든지 한편 성 억압에는 첨예한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민중이란 말로 포괄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억압 구조에는 무관심한 듯한 현실이 그것이다.”라고 ‘여성’을 배제한 민중운동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성해방출사표』에서는 ‘여성사 다시 쓰기’라는 기획에 따라 「이야기 여성사」와 「여성사 연구」라는 부제를 단 일련의 시들을 통해 여성 억압의 원인과 그 극복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해방출사표』를 던지면서 시작된 고정희의 여성해방운동과 글쓰기는 여성사에 관한 남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와 시의 새로운 결합을 꾀하고, 사람의 근본과 돌아갈 곳을 ‘어머니’의 모성으로 상징화함으로써 여성주의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고정희는 생전에 10권의 시집과 유고 시집 1권을 포함해 모두 11권의 시집을 남겼다. 43세라는 젊은 나이, 15년여라는 비교적 짧은 창작 기간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작품의 양은 고정희가 남달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고정희는 자신과 주변 사람, 사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선명히 파악한 사람으로서 인생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우리가 소망하고 또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사람 중 하나이며 시와 삶이 거의 일치한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고정희는 우리 시사에서 여성문제를 최초로 폭넓게 탐구한 여성주의 시인으로,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과 왕성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역사에 대한 준열한 증언을 하였던 민중 시인으로, 또 기독교 정신과 생명에 대한 도덕적 순수함으로 처연한 서정성을 보여 준 서정 시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시인을 품은 해남]

김남주고정희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활동은 2000년부터 ‘땅끝문학회’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김남주기념사업회와 고정희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각각 문학제와 문화제 등을 개최하고 있다. 특히 2007년에는 해남군의 지원으로 ‘김남주 생가’를 복원하고 생가 주변에 작은 시 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김남주 시인의 삶과 시정신을 배우는 공간 콘텐츠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6월에는 고정희 생가에서 ‘고정희문화제’가, 11월에는 김남주 생가에서 ‘김남주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김남주고정희의 시정신은 지역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계승되고 있으며, 고정희의 시정신은 여성주의 시민모임인 ‘해남여성의소리’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