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정씨의 혼맥, 해남을 꽃피우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70
한자 海南鄭氏-婚脈海南-
이칭/별칭 초계정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삼

[정의]

조선 전기 해남정씨 가문이 해남 지역에서 다른 사족 가문과의 혼인을 통하여 사족화되는 과정.

[개설]

조선 전기 해남정씨가(海南鄭氏家)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왜구 침탈로 인한 혼란 수습과 해남현 치소를 옮기는 과정에 기여하여 향역을 면제받고 인근 지역 사족과의 혼인을 통하여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해남정씨와 통혼한 사족들도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해남정씨가는 해남 지역 사족들의 연수(淵藪)[물고기와 새들이 모이는 곳]가 되었다.

[해남정씨(海南鄭氏), 사족의 길에 들어서다]

조선시대 해남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을 꼽으라면 흔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등을 배출한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바탕에 해남정씨 집안과 혼인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해남윤씨 외에도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6~1568] 등의 집안이 해남정씨와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해남정씨 집안과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해남으로 옮겨 살면서 사족으로 성장한 가문이다. 조선 전기 해남 지역의 재지사족은 해남정씨 집안과 혼인관계로 맺으면서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친손과 외손들이 문과에 등과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지역의 명문 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점에서 해남정씨의 사족화 과정은 해남 지역 재지사족의 형성 및 성장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해남정씨 가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 전기에 해남 지역의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을까?

해남정씨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 침탈로 발생한 해남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적극 앞장선 해남의 토착 세력이다. 「보략」에 의하면, 해남정씨가는 정원기(鄭元基), 정용(鄭龍), 정재전(鄭在田)의 3대를 거치면서 해남에서 위상이 점차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정원기는 해남정씨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이며 “인민이 무통하기에 풍속을 바로잡고자 스스로 읍리가 되길 원했다.”라고 「보략」에 기록되어 있다. 『초계정씨호남대동보』에도 “애초 원기는 고려조의 원로였는데, 조선 용흥지초(龍興之初)에 남쪽으로 피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그 죄를 면하고자 해남의 호장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두 자료 모두 정원기를 읍리 또는 호장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해남현의 행정을 담당하였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해남을 비롯한 남해안 지방은 왜구의 침탈로 피해를 입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해남현의 읍리(邑吏)였던 정원기는 이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지역민의 결의와 단합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정원기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해남정씨도 해남의 제1 토성으로 성장하였다.

다음은 정원기의 아들인 정용인데, 정용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이는 정용 대에 와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업적 없이 아버지의 향직을 이어받는 것에 만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정용의 아들인 정재전은 상당히 탁월한 행정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재전의 행적은 해남과 진도의 통폐합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정재전이 합군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합군 이후에도 해진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할아버지인 정원기 대에 확보한 막대한 재력과 사회적 위상을 바탕으로 해남과 진도의 합군을 적극 앞장서서 주도하였음을 의미한다. 정재진이 해진군의 치소를 옮길 때 소요되는 재원을 부담한 점이나, 합군 이후 호장의 지위를 확보한 점이 이를 말해 준다.

당시 해남 지역에는 해남현·죽산현·옥산현·진산현·황원현 등 다섯 개의 현이 있었는데 행정체제 재편은 해남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해남과 진도의 통합 과정에서 군명(郡名)을 두 지역의 첫 글자를 취하여 ‘해진(海珍)’으로 정하였고, 분군 후에도 현명(縣名)을 다시 ‘해남(海南)’으로 환원한 것을 보면, 이는 해남현의 군세가 월등해서라기보다는 합군 과정에서 해남현 출신인 정재전이 통합과 분군의 주도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정재전은 해남현의 통폐합 과정에 적극 나선 공을 인정받아 해남현 호장이 되었고, 이후 후손들은 향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해남정씨가 단순히 향역의 부담에서 벗어났다는 것보다 재지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해남정씨(海南鄭氏), 사족의 길을 걷다]

정재전 대에 향리 신분에서 벗어난 해남정씨 집안은 정재전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 인근의 재지사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격상되었다. 해남정씨가 향역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사족으로써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 조건 중의 하나일 뿐 사족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해남정씨가 지위가 높은 사족들과 통혼을 하든지, 아니면 후손 중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직에 진출해야만 온전한 사족으로 인정받게 된다. 해남정씨는 정재전의 자식 대에 이르러 통혼과 관직 진출을 통해 재지사족이 되었다. 정재전의 아들인 정문명(鄭文明)이 소과에 합격으로 생원의 지위에 올랐는데, 향역에서 막 벗어난 향리 가문에서 소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재지사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해남정씨의 관직 진출은 정문명의 아들 대에 이르러 더 확대되었다. 정문명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정귀감(鄭貴瑊)은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참군을 지냈으며, 사위인 임수(林秀)와 이유(李裕)도 현감과 진사가 되었다. 해남정씨의 중앙 관계 진출은 정귀감 대에 이르러 사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정귀감은 딸만 하나 두었는데, 사위인 최부가 문과에 등과한 후에 부응교(副應敎)까지 역임하였다.

정문명의 둘째 아들인 정귀영(鄭貴瑛)은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손자인 정공유(鄭公裕)가 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어서 정공유의 아들인 정언홍(鄭彦洪)과 정언식(鄭彦湜)이 나란히 문과에 등과함으로써 중앙 관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정언홍은 정랑에, 정언식은 부사에, 정언순(鄭彦淳)은 봉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해남정씨는 정재전이 호장의 지위에 오른 지 5대째 만에 중앙의 문반직을 배출하게 되었다. 정귀영의 사위인 윤효정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해남에서 자제 교육에 힘쓴다.

이처럼 해남정씨는 15세기 전반 행정 체제 개편 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면역의 혜택을 받고 향리직에서 벗어난 뒤로 지속적인 관계 진출을 시도한 결과, 15세기 후반에 사위 최부가 문과 급제로 중앙 관계 진출의 문을 열었고 16세기 중반경에는 정언홍·정언식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 관계에 진출함으로써 확실한 사족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해남정씨, 해남 사족의 연수(淵藪)가 되다]

해남정씨 집안은 15세기 말 이후부터 선산임씨(善山林氏), 여흥민씨(驪興閔氏), 탐진최씨(耽津崔氏), 원주이씨(原州李氏), 해남윤씨(海南尹氏) 등 여러 가문들과 통혼 관계를 맺었다. 이는 마치 안동 지역이 회헌(晦軒) 안향(安珦), 목은(牧隱) 이색(李穡),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을 배출하면서 혼인 관계를 통해 안동권씨(安東權氏), 동래정씨(東萊鄭氏), 성산이씨(星山李氏), 광릉이씨(廣陵李氏) 등 많은 가문을 처향인 안동으로 끌어들여 안동 지역이 재지사족의 소굴이 된 것과 흡사하다. 해남정씨는 비록 그 직계 후손들은 크게 번성하지 못했지만 외손들이 수많은 벼슬을 지내고 번성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정재전의 후손들 중에서 현달(顯達)[벼슬, 명성,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한 자가 많았는데, 특히 외손 중에서 과거 급제자가 6인, 부마 2인이 배출되었다. 이는 해남 지역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이룬 해남정씨의 기반을 바탕으로 외손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남정씨가 이러한 성장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은 해남현 읍치의 동문 밖 금강산 석봉 아래이다. 동문 밖은 지금의 해남읍 해리를 말하는데, 해남정씨의 직계 자손은 물론이고 다섯 사위와 그 자식들까지 모두 이곳에 모여 살았다. 해남의 육현(六賢)으로 추앙받는 최부, 임억령, 유희춘, 귤정(橘亭) 윤구(尹衢)[1495~?], 윤선도, 취죽헌(翠竹軒) 박백응(朴伯凝) 등의 집안이 들어와서 살았던 이곳을 부춘동(富春洞)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들은 대부분 해남정씨가와 직간접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은 집안 출신이다.

해남정씨가의 정언홍·정언식 형제를 비롯하여 선산임씨 임수와 후손들, 여흥민씨 민중건(閔仲騫)[1447~?]과 후손들, 해남윤씨 윤효정과 후손들, 최부와 사위인 선산유씨(善山柳氏) 유계린(柳桂鄰), 무안박씨(務安朴氏) 박종정[1407~1478]과 후손들이 모두 이곳에 거주하며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해남정씨가와 혼인 관계를 맺고 해남에 이거한 해남정씨가의 다섯 사위들과 그 후손들이다. 이들 다섯 사위 집안은 인근 지방의 사족들과 통혼 관계로 연결되었고, 후손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활발하게 관직으로 진출하면서 해남 지역의 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해남정씨 통혼 가문, 해남에 뿌리내리다]

해남정씨가와 혼인을 하고 그 후손들이 해남에 계속 거주한 집안은 정문필의 사위인 민중건 가계와 정귀영의 사위인 윤효정 가계이다. 두 가문은 재지적인 성격이 강한 사족 가문이다.

정문필의 사위인 민중건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계유정난 때 할아버지 민신(閔伸)을 비롯하여 다섯 명의 형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자 집안 노비의 등에 업혀 다시 진도현감으로 있던 외삼촌에게 피신하였다. 이후 외삼촌이 임지를 떠나면서 민중건해남정씨에 의탁하여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었다.

민중건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민오(閔鰲)와 민구(閔龜), 열녀 민씨(烈女閔氏)가 그들이다. 민중건의 후손들은 상당 기간 동안 출사하지 못하였다. 민중건의 자식 대에도 민오는 선무랑, 민구는 헌릉참봉을 역임하는 등 크게 현달한 인물이 없었으며, 이후 5대까지 문과 급제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채 하급 말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향촌사회에서 여흥민씨의 위상은 민중건의 자식 대부터 점차 커졌다. 민구가 1549년 해남향교 대성전 중수 때 이억과 더불어 실질적인 중수 책임자인 감역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활동은 민구의 자식 대에도 계속 이어져 1610년 이루어진 명륜당·대성전 중수에서도 여흥민씨가 감역[민장안·민사안]과 장의[민문철], 그리고 집사[민문언]까지 맡았다. 이런 사실은 여흥민씨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전반까지 해남향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을 것으로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민귀영의 사위인 윤효정최부의 문인으로,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계에 진출하지 않고 자녀 교육에 힘썼다다. 당시 사람들은 윤효정를 ‘삼개옥문(三開獄門)’하였다고 칭송하였는데, 이는 사재를 털어서 흉년으로 조세를 납부하지 못하여 옥에 갇힌 주민을 세 번이나 사면시켜 주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다. 이런 적선으로 향촌사회에서 윤효정의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윤효정이 이런 적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처가인 해남정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농업 경영에 힘써서 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효정의 집안은 시조 윤존부(尹存富)로부터 8대 윤광전(尹光琠) 대에 이르기까지 강진 지역에서 삼별초의 난 진압과 서남해안에 수시로 출몰하던 왜구 소탕에 참여한 하급 무관 집안이었다. 윤효정 대에 이르러 해남정씨와 혼인하면서 거주지를 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윤효정의 네 아들 중 윤구·윤항(尹衖)·윤행(尹行)과 후손들은 주로 해남에서 거주하며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넷째 아들 윤복(尹復)은 해남과 가까운 강진 도암에서 거주하였다. 해남윤씨는 서울에서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그 뿌리는 늘 해남에 두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여흥민씨와 함께 가장 재지적인 성격을 크게 드러낸 가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문이 지니고 있는 재지적 성격에는 많은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여흥민씨는 주로 해남의 사족 지배 기관에 참여해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해남윤씨는 중앙의 관료로 진출해서 얻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수령에게 직접 행사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다. 같은 재지사족이라 하더라도 문과 급제자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느냐에 따라 가문의 사회적 위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해남정씨 통혼 가문, 재경관인사족(在京官人士族)이 되다]

지금까지 해남정씨의 성장 과정과 해남정씨와 통혼하여 해남 지역에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였던 선산임씨·원주이씨·여흥민씨·탐진최씨·해남윤씨가 등 다섯 사위 집안을 중심으로 해남 지역의 재지사족 형성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토착 세력이었던 해남정씨는 15세기 전반 무렵 지방행정 체제 재편 과정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고, 15세기 중반부터 인근 지역의 재지사족들을 통혼 관계를 맺어서 해남지방으로 끌어들여 거대한 재지사족 집단을 형성하였다.

해남정씨의 다섯 사위들은 혼인 후에 처가가 있는 해남으로 거주지를 옮겨 그 후손들이 해남을 터전으로 삼아 재지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사족 집안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처가인 해남정씨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해남정씨와 다섯 사위 집안은 자기 집안의 필요에 따라 서로를 통혼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즉, 해남정씨는 사족의 위상을 가진 다섯 사위 집안을 선택했을 것이고, 다섯 사위 집안은 해남정씨 집안의 막강한 경제력이 필요하여 선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형성된 해남 지역의 재지사족 집단은 16세기 전반부터 후손들이 문과에 등과하여 서울로 거처를 옮겨 관료 생활을 하거나, 해남 지역의 사족 지배 기구에 적극적 참여하여 재지사족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특히 이들은 16세기경부터 인근 지역의 또 다른 재지사족과 혼인관계를 맺어 이들까지 해남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해남 지역 재지사족의 수는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남 지역은 여말선초까지만 해도 미미했던 군세가 커졌는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명칭은 비록 현(縣)이지만 산물이 많고 지역이 크며, 토호가 많고 양영(兩營)[해남 우수영과 강진 병영] 사이에 끼어 있어 본디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사족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는 해남정씨와 통혼 관계를 맺은 사족들이 해남에 터를 잡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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