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58
한자 日帝下 强制動員- 犧牲羊-玉埋山 鑛夫-海沒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변남주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옥매광산 노동자들이 제주도로 강제 동원이 되었다가 해방 후 고향으로 귀향하던 중 바다에서 수몰된 사건.

[개설]

1945년 8월 20일 새벽,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옥매광산 광부 255명은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으로 제주도에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드디어 배를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광부들을 실은 배가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 앞바다에 다다랐을 오전 여덟 시 무렵,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네 시간가량 표류한 끝에 침몰하고 말았다. 255명 중 구조된 사람은 137명이고, 118명이 이 사고로 수몰되었다.

옥매산 광부들의 해몰사건은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2년에 들어 옥매산 꼭대기에서 일본 쇠말뚝이 발견되면서 일제강점기 광부들의 수몰 사건도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였고,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진행한 기초 조사와 보고서도 나왔다. 사건이 일어나고 67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옥매산은 어떤 산인가]

옥매산(玉埋山)은 전라남도 해남군의 황산면문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유재란 때는 왜선의 동태를 감시하고 강강술래를 하였다는 설화 등이 전하는 명산(名山)이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옥매산(玉梅山),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매옥산(埋玉山)이라 했으며 “화반석(華班石)이 나온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붉은 옥을 화반석이라 했고 조선 초에도 옥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옥매산은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에 딸린 봉산(封山)으로, 소나무를 공급하는 국유지였다. 당시 옥매산은 소나무가 울창했고 산림이 우거져 호랑이가 살 정도였다. 옥매산은 물맛이 좋아 전라우수영 우수사가 먹었다는 참샘도 있고, 용의 형국으로 기우제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옥매산제를 지냈다는 용샘 위에 호랑이 굴이 있는데, 지금의 황산면 옥동리였던 19세기 옥동마을의 김순하가 호랑이를 잡아 어머니의 원한을 갚은 곳이다.

그런 옥매산의 현재 모습을 보면, 붉은 빛 돌들이 흘러내리는 듯한 독특한 모습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인데 이는 광산 개발로 깎이고 헐벗은 흔적이다. 옥매산의 최고 높이도 원래는 173.9m였으나 봉우리 부분 20여m가 깎이자 168m 높이 산등성이가 산꼭대기로 변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무렵, 옥매산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수탈 기지로 전환되면서 옥매산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일제에 의해 전투기 제조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원석인 명반석 광산으로 개발된 것이다.

명반석은 일본에서는 나지 않는 귀한 광물이다. 매장량은 2000만 톤 이상으로, 당시 일본 소비량을 기준으로 200년 정도를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일본 시카마[飾磨]화학공업에서 시작하여 아사다[淺田]화학공업 등으로 광업권자가 바뀌면서 명반석을 채굴해 알루미늄을 제조하였는데, 명반석 13톤에서 알루미늄 1톤을 추출하였다. 옥매산에서 채석한 명반석은 떡봉산 남쪽 선창까지 옮겨졌다가 선박을 이용해 일본으로 운송되었다. 옥매산 광산이 대대적으로 개발되었고, 최대 1,200여 명의 광부가 일하였다. 광부 대부분은 옥매산 인근 마을 사람들이었다. 다음은 옥매광산 집단 수몰 희생자의 아들 박길천의 증언을 재구성한 것이다.

[250명 광부들 제주도 강제동원 ‘짐승같이 일만 했다’]

1945년 3월 하순 무렵, 옥매광산 광부들에게 동원령이 떨어졌다. 모두 회사 광장으로 모이라는 전갈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광부들이 광장에 모두 집결했는데 그들 주위를 일본 경찰과 헌병이 둘러싸고는 항구로 끌고 가 두 척의 배에 나눠 태우고 한 척의 배에는 연장을 실었다. 이때 광산의 일본인 간부 다섯 명도 광부 관리 차원에서 동행하였다. 배는 어두워질 무렵 출항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군의 폭격이 무서워 늦은 시각에 출항한 것이라 하였다.

배에 강제로 실린 광부들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밤이 깊어지자 잠시 쉬기 위해 배가 멈춘 곳이 추자도 앞바다였다. 이때 광부 한 명이 탈출하려고 배에서 뛰어내렸다. 수영을 매우 잘한다는 그 광부는 겉옷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내의 차림으로 뛰어내렸는데, 이때 “풍덩!” 하는 소리 때문에 들켜 일본 헌병들이 보트로 추격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 광부는 잡혀 왔다. 잡혀 온 그 광부는 광부 일행에게 추자도 섬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막상 헤엄을 쳐서 가려 하니 너무 멀었다며 일본 헌병에게 잡히지 않았으면 오히려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내의를 입고 헤엄을 치니 물속에서 뭔가 자꾸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며 바다에서는 옷을 다 벗어야 살겠더라고 하였다. 이때의 말이 이후 광부들이 바다에서 표류할 때 모두 옷을 벗은 이유가 되었다. 이튿날 배는 제주 성내포구[제주시 산지포구]로 입항하였다. 광부들은 배에서 내려 항구에 깔려 있는 너덜너덜한 거적때기 위에서 주먹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 당시 이미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었다. 일본군은 만주의 관동군과 한반도, 일본 본토의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일본 본토로 진격해 오는 미군을 제주도에서 막으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1945년 3월 3,000여 명이던 제주도 주둔 일본군 병력은 해방 무렵에는 7만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 제주도에는 군사시설이 곳곳에 구축되는데, 군사시설 구축에는 제주도민들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등 전국의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특히 제주도민들은 군사시설 구축 작업이 본격화되던 1944년부터 마을별로 동원 할당량이 배정되었다. 옥매광산 광부들이 모슬포항에 이르렀을 때, 전국에서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들도 속속 모슬포항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여러 곳으로 나뉘어 군사시설 작업에 투입되었다. 옥매광산 광부들도 곳곳으로 흩어졌다. 제주도에 끌려간 옥매광산 광부들은 세 명씩 한 조가 되어 굴을 팠다. 숙소는 절벽 앞에 땅을 파고 그 위에 천막을 씌운 곳이었다. 해어진 일본 담요를 덮고 잤고 먹을 것은 부족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소여물 같은 것이었다. 기술자는 형편이 조금 나았지만 굴 파는 사람들의 고생은 너무도 컸다.

[강제 노동, 그리고 해방]

매일 반복되는 강제 노동에 지쳐 날짜가 가는 줄도 모르던 어느 날, 일본 하급 병사들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를 통해 일본의 패전 소식이 들렸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식에 광부들의 앞날은 오리무중이었다. 전쟁에 진 일본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노릇이었고, 일본군 사이에서 떠도는 미군들에 대한 흉흉한 유언비어들이 광부들을 겁먹게 하고 있었다.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이어지자 광부들 중 일부는 탈출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일본군들은 8월 15일 다음 날 광부들을 풀어 주고 트럭으로 제주항까지 실어다 줬다. 그러나 제주항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배가 없었다. 당시 배라고 생긴 것은 모두 미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바다에 떠 있는 배를 찾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고향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조바심이 일었지만 광부들은 어쩔 수 없이 제주항에서 발이 묶였다. 255명이 제주항에서 언제 올지 모를 배를 기다리며 사나흘을 보냈다. 드디어 기다리던 배가 왔다. 배는 35톤 화물선으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여서 255명이 모두 승선할 수 있는지 떠나기 전날 밤에 시험 승선을 하였다. 그러고는 배에서 내린 광부들은 제주항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 두 시에 다시 배에 올랐다. 부푼 마음으로 제주항을 떠나는 날, 파도는 심하였지만 날씨는 좋았다.

[“불이야”, 배에 불이 났다]

더운 여름날이라 배 안에 빽빽이 들어앉은 사람들 몸에서 나는 땀 냄새에 배멀미로 많은 광부들이 시달리다가 피로와 졸음에 쓰러지다시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전 여덟 시 무렵이었다. 기관실에서 불이 난 것이다. 그 배는 항해 도중에 자주 고장이 났는데 세 번째 고장 후에 시동을 걸다가 불이 났다. 당시는 휘발유가 굉장히 귀하던 시절인데, 그 배는 일본 군대의 휘발유 한 드럼을 훔쳐 몰래 기관실에 숨겨 놨던 모양이었다. 기관실에서 난 불이 휘발유에 옮겨 붙으면서 순식간에 불길이 번져 버렸다.

처음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렸을 때만 해도 금방 불씨를 잡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선원들의 진화 노력이 계속되는 중에도 불은 더 크게 번졌다. 배 밑에 있던 사람들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자 밖으로 뛰쳐나왔다. 배는 작고 사람들은 많은데 불길이 계속 번져 나가자 배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장이 가장 먼저 탈출하고 기관장은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들려왔다. 불이 계속 번지자 뜨거움에 참다 못한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물에 빠지면 옷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모두 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 중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그 즉시 죽어 나갔고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나무판자 같은 것을 붙잡고 바다 위를 떠 다녔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불어 파도가 정말 심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너무 높아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궤짝 같은 것이 떠 다녀서 그 궤짝을 여러 명이 서로 붙잡고 버텼다. 파도는 심하고 심신은 지치고, 함께 붙잡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힘이 빠져 궤짝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여덟 시간 정도를 그렇게 버텼다. 광부들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제주항을 떠나기 전 이튿날 오전 여덟 시쯤에 제주에서 또 하나의 배가 출발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배가 지나다 불타는 배를 발견할 것이라는 생각에 서로를 격려하며 버텼고 그래서 불에 휩싸인 배 주위를 애써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결국 여덟 시간 정도를 표류하다가 배를 만났다. 일본 군함인 소해정이 목포에서 진해로 가는 도중에 배에서 난 연기를 보고 다가왔던 것이다.

일본 군함이 광부들을 발견하고 수영해서 오라고 하였다. 몇 명이 헤엄을 쳐서 군함으로 다가가자 배 위에서는 그들을 끌어 올려 주었다. 군함에 있던 일본인은 제일 먼저 오른 일본인에게 일본인은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광부들이 탔던 배에는 다섯 명의 일본인이 함께 있었다. 옥매광산에서 제주도로 갔을 때부터 함께한 이들로, 이들은 옥매광산 측의 간부들이었다. 이들 간부는 광부들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동행하였고 제주도에 도착해서는 보이지 않다가 돌아오던 배에 다시 승선하였던 것이다. 일본인 다섯 명이 승선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함은 망원경으로 바다 위를 살피며 불타는 배 주위를 서서히 돌기 시작하였다. 일본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와중에 살아 있는 한국 사람들을 배에 태웠는데, 그렇게 구출된 광부들이 137명이었고 일본인도 두 명 더 구조되었다. 나머지 일본인 둘이 죽었다는 확신이 들자 군함은 그곳을 떠났다. 여전히 구조되지 못한 채 파도에 시달리던 이들은 배가 떠나려 할 때 살려 달라고 아우성쳤지만, 일본 군함은 그들을 구조하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 그 배는 결코 작은 배가 아니었으나, 조선인들을 더는 구조하지 않고 떠나 버린 것이다.

군함에 구조된 광부들도 완도 청산도의 어느 섬에 이르렀다. 섬 가까이에 이르자 젊은 어민들의 선박이 군함으로 다가와 광부들을 섬으로 실어 날랐다. 137명의 생존자들은 대부분이 알몸인 채로 그렇게 청산도 어느 섬 항구에 이른 것이다. 군함은 생존자들을 그곳에 내려놓고 구조한 일본인 간부 세 명을 태우고 진해로 향하였다. 구조된 일본인 간부들은 표류자들을 바다에 내버려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아는 광부들이 가만두지 않을까 봐 두려워 배에서 내리지 못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후 진해에서 하선하여 육로를 통해 옥매광산에 도착하였다.

[5개월만의 귀환]

청산도에 도착하자 어민들이 배를 가지고 나와 군함에서 내린 생존자들을 선착장까지 싣고 갔다. 생존자들을 선착장까지 태워다 준 어민들은 20~30대 정도의 젊은 층이었고 이들은 마을에 가서 따뜻한 물과 사탕, 과일 등을 가져와 생존자들에게 주었다. 선착장에 도착한 생존자들은 대부분이 알몸이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은 컸지만 오랜 시간 파도 속에서 시달렸기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지쳐 있었다. 알몸에 새까맣게 타고 지쳐서 초췌해진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 난민의 몰골이었다. 청산도 청년들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잠옷을 찢어 생존자들에게 주어 천으로 중요한 부위라도 가릴 수 있게 하였다.

청산도 어민들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고 생존자들은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청산도 어민들은 배가 난파한 곳으로 가 보자고 하였다. 파도와 싸우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존자들 중에는 그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결국 배는 나머지 생존자를 찾으려고 떠나지 못하였다. 제주도를 떠났던 255명 중 구조된 사람은 137명, 118명은 바다에 그대로 수장되었다.

살아남은 광부들이 청산도 어민들이 내준 돛단배로 간신히 해남으로 돌아온 것은 제주도로 강제로 끌려간 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품삯 한 푼 받지 못하고 노역에 시달렸고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선 너무도 많은 생명을 바다에서 잃었다.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는 부자도, 형제도 있었다. 5개월만에 만난 해남 사람들은 광부들이 5개월 전에 갑자기 사라진 것이 모두 제주도로 강제로 끌려갔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광부들이 돌아온 뒤로 각 마을은 초상을 치러야 했고 광부들이 떠났던 항구에선 원혼을 달래는 큰 굿이 2~3개월간 치러졌다.

[옥매산 광부 해몰사건 이후의 이야기]

2012년 8월 15일 옥매산 꼭대기에서 발견된 일제의 쇠말뚝을 제거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때 해몰 광부들의 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고, 광부들의 해몰사건도 이슈화되기 시작하였다. 옥매산 일대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2015년에는 미암극단이 “그들의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무대에 올려 유가족과 슬픔을 같이했다. 이어 2018년에는 다큐멘터리 「옥매산 그 아픔을 넘어」가 제작되어 SBS에서 방영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해남군민 1,300여 명이 1만 원씩 모금하여 건립한 조형물이 옥매산 선창 현장에 건립되고 합동 추모제도 열렸다. 유가족 박길천도 추모제에 참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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