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59
한자 海南白浦灣-古代 浦口勢力
영어공식명칭 Port Power from Haenam Baekpom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봉룡

[정의]

해남 백포만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던 고대 해양세력.

[백포만의 해양환경과 고대 포구 세력]

백포만은 해남반도의 서해 남부에 위치하며, 화산면의 남서 연안과 현산면의 서안, 그리고 송지면의 북서 연안으로 둘러싸여 있다. 백포만의 이름은 현산면백포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다. 백포만의 서쪽 건너편에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도가 있고, 그 사이에 명량해협이 있다.

백포만은 우리나라 서해의 남쪽 끝단에 있어, 서해에서 남해로 이어지는 서남해 바닷길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북으로 이순신의 해전으로 유명한 명량해협울돌목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화원반도 및 무안반도와 신안군의 섬들이 서로 마주하며 다도해의 수많은 소로들을 형성한다. 남으로는 송지면의 끝단이자 한반도의 끝단에 해당하는 땅끝을 좌편에 끼고 동쪽으로 돌아가면 장보고 대사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양 교류 활동을 주도하던 남해의 초입부, 완도 다도해의 소로들로 이어진다.

백포만 인근 해역은 국내 서남해 바닷길을 넘어 동아시아 국제 바닷길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서해를 따라가면 중국 대륙으로 통하고 남해를 건너가면 일본 열도로 이어진다. 유명한 장보고의 무역기지인 청해진과 이순신의 해전지가 이 해역에 병존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최적의 해양환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백포만은 간척으로 인해 지금은 단조로운 지형으로 변하였지만, 옛적에는 지금의 현산면송지면 사이로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왔다. 현산면백포리, 초호리, 고현리, 일평리, 읍호리, 구산리, 조산리, 월송리 일대와 송지면가차리, 군곡리, 금강리 일대는 지금은 평야로 변모되어 있지만 원래는 모두 백포만의 바다였다. 다만 현재 백포만 간척지 평야의 중심부를 적시며 서쪽 명량해협으로 흘러드는 한탄천과 구산천 등의 물줄기들은, 바다였던 옛 시절의 백포만 바다 갯벌을 가로지르던 갯강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근래에 백포만에 인상적인 고대 포구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사서를 통해 전해지고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는 백포만이 보유한 최적의 해양환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백포만의 고대 포구세력은 먼저 3세기 후반에 중국 사서인 『진서(晉書)』에서 ‘신미(新彌)’라는 이름으로 처음 전해진 이후, 4세기 후반에는 일본 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침미다례(忱彌多禮)’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5세기 후반에는 『삼국사기』에 ‘탐라(躭羅)’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사서에 나타나는 각 시기별 포구 세력의 존재는 백포만 일대에서 찾아지는 패총, 고분, 산성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먼저 백포만의 대표 유적인 해남 군곡리 패총에 대한 소개로부터 시작하여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이 각 시기별로 국내와 동아시아의 동향에 어떻게 적응하였는지 따라가 보자.

[백포만의 대표 유적 해남 군곡리 패총]

해남 군곡리 패총백포만에 돌출된 해발고도 약 27.8m의 해안 구릉[송지면 군곡리 907번지]에 있다. 1986년부터 2018년까지 총 6차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인돌, 패총, 주거지, 토기 가마, 수혈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이들 유구에서는 경질 민무늬토기, 타날문토기 등의 토기류, 화살촉, 빗창, 가오리침, 작살, 바늘, 도자병 등의 골각기, 패천, 토제 곡옥, 유리구슬, 관옥 등의 장신구, 그 밖에 화천, 방추차, 철제 낚싯바늘, 자연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패총 이외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그 유구들에서 다채로운 다국적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해남 군곡리 패총은 단순한 패총 유적이 아니라 집단 취락지가 형성된 포구의 복합유적으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 신(新)나라 때 주조된 동전인 화천(貨泉)이 출토된 것은 백포만이 고대 동아시아 무역의 주요 거점 포구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최근에 이루어진 6차 조사[2018년 9월 19일~2019년 1월 17일]는 구릉의 상부와 경사면, 그리고 평지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되다. 6차 조사를 통해 고대 포구의 복합유적으로서 해남 군곡리 패총의 성격은 더욱 보강되었다.

먼저 구릉의 상부에는 기원 후 축조된 주거지, 수혈,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의 유구가 밀집 분포하는데, 경질 민무늬토기, 호형토기(壺形土器), 발형토기(鉢形土器),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주거지는 점토 벽체와 부뚜막, 벽구, 주공 등의 내부 시설물이 확인되었다.

구릉의 경사면에서는 세 지점에 걸쳐 패각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패각층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특히 소성유구에서는 점토에 초본류를 섞어 만든 소토 덩어리와 경질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어 가장 빠른 단계의 토기 가마가 군곡리 유적에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구릉의 평지부에는 수백여 기의 주거지와 다양한 유구 등이 밀집되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로는 청동기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 패총 등이 있다. 유물로는 외면에 타날문이 찍혀 있는 호형토기,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 주구토기, 시루 등이 출토되었다.

해남 군곡리 패총은 단순한 패총 유적을 넘어서서 주거지, 소성유구[토기 가마], 고분, 수혈 등의 다양한 유구가 혼합되어 있고, 다채로운 다국적 유물이 나오고 있어, 한때 성세를 누리던 고대 포구 마을의 복합유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해남 군곡리 패총은 2003년 7월 2일 사적 제449호로 지정되었다.

[3세기 후반의 백포만 포구 세력, 신미(新彌)]

백포만의 고대 포구 세력은 3세기 후반에 ‘신미’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현한다. 『진서』의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29국의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 282년에 처음으로 진(晉)에 사신을 파견해 왔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그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이란 ‘동이사회의 마한 지역에 존재한 신미의 여러 나라’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동이 마한’과 ‘마한 지역’은 막연한 종족적, 지역적 개념에 해당한다 하겠으므로, 그 실체는 ‘신미의 여러 나라’ 29국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신미의 여러 나라’ 29국은 일반적으로 3세기 이후에 영산강 유역에서 독특한 옹관고분을 공유하면서 정치적 연대를 이루고 있던 일군의 고대 세력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 세력 집단은 무언가의 목적을 위해 공동의 집단 사절단을 결성하여 282년에 처음으로 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셈이 된다.

먼저 ‘신미의 여러 나라’에서 ‘신미’의 실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는 해남 백포만의 고대 포구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미’라는 이름이 통일신라 때 현산면 일대를 지칭한 침명(浸溟)이라는 지명과 서로 통할 뿐만 아니라, 3세기 후반 전후의 시기에 인상적인 고고학 자료가 백포만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백포만 일대에는 패총 유적이 집중 분포한다. 신석기 시대의 현산 두모리 패총으로부터 철기시대의 해남 군곡리 패총, 가치리 패총, 일평리 패총, 금강리 패총 등이 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해남 군곡리 패총이다. 해남 군곡리 패총은 기원전 3세기 말엽부터 기원후 4세기 전반 무렵까지 장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고, 국내외 해상 문물 교류을 반영하는 유물들이 대거 수습되었다. 중국 신(新) 왕조[기원후 8~23년] 시대에 주조된 화폐인 화천(貨泉)은 백포만에 1세기경에 국제 물자 교역의 주요 거점 포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밖에 복골, 골제 뒤꽂이, 철기류 등은 중국과의 문물 교류를, 토제 곡옥, 복골, 각골, 토기류 등은 일본과의 문물 교류를 반영하는 유물들이다. 또한 화천, 복골, 토제 곡옥 등은 김해 지역의 패총에서도 출토된 바 있고, 군곡리에서 나온 단면삼각형구연토기나 토기뚜껑, 고배 등은 사천시 늑도 패총에서 출토된 대표 유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백포만이 연안 해로를 통해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국내외 문물 교류의 주요 거점 포구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 대형 합구옹관(合口甕棺)과 수 개의 원형 봉토가 확인되었고, 최근에는 백포만의 북안(北岸)에 위치한 화산면안호리평호리 일대에서도 옹관고분 등 3~4세기의 고분 50여 기가 발굴되어 단경호(短頸壺), 이중구연호(二重口緣壺)[겹아가리이중단지], 양이호, 조형토기 등과 환두도, 철부, 철정, 철도자 등이 출토된 바 있어, 일찍이 백포만 일대에는 고대 포구 세력이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더불어 특이한 옹관고분의 전통을 공유하면서 크게 흥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백포만의 고대 포구 세력이 바로 282년 진에 처음 사신단을 파견하였다고 한 ‘동이마한신미제국’의 ‘신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 신미는 3세기 후반 진과 처음으로 교섭하는 과정에서 영산강 유역의 고대 세력집단[‘신미의 여러 나라’ 29국]을 대표하였던 셈이 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외항 혹은 관문(Gateway)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82년에 ‘신미의 여러 나라들’ 29국이 진에 처음 사신단을 파견한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3세기 후반 경에 한강 하류에서 일어난 백제가 급성장하여 충청도 일원의 마한 중심 세력을 병탄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282년에 영산강 유역 세력 집단들이 백포만의 포구 세력인 신미를 앞세워 ‘동이마한신미제국’의 이름으로 진에 집단적으로 사신단을 파견했던 것은, 이러한 백제의 급성장 추세에 위협에 느끼고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단행한 외교적 포석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4세기 후반의 백포만 포구 세력, 침미다례(忱彌多禮)]

백포만의 고대 포구 세력은 3세기 후반 진에 사신단을 파견한 이후 사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4세기 후반에 ‘침미다례’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369년에 백제는 탁순국[지금의 창원 소재]을 거점 삼아 신라와 가야를 깨뜨리고 그 여세를 몰아 고해진(古奚津)[지금의 강진]을 거쳐 침미다례를 도륙했다고 나온다. 침미다례는 백포만의 포구 세력인 신미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그간 신미[=침미다례]는 어찌 되었던가? 우선 그간의 경과를 국제정세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3세기 후반 충청도 지역의 마한을 병탄한 백제는 진의 견제를 받아 책계왕과 분서왕이 잇따라 전사하거나 암살당하는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그래서 282년 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를 견제하려 하였던 신미[=침미다례]는 당분간 백제의 위협에서 벗어나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4세기에 접어들면서 진이 북방 선비족 모용씨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더니 317년에는 남쪽으로 쫓겨 가서 동진(東晉)의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던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과 황해도 연안의 대방군마저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아 각각 313년과 314년에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국운을 건 쟁패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이에 당분간 남쪽의 신미[=침미다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4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369년 고구려를 잇달아 격파하고 주도권을 장악하고 남방으로 세력 확대를 본격화하였다. 369년에 백제가 신라와 가야를 치고 침미다례를 도륙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는 이러한 백제의 추세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일본서기』의 기사는 유독 침미다례에 대하여 남쪽 오랑캐라는 뜻의 남만(南蠻)이라 비칭(卑稱)하면서 그들을 ‘도륙’하였노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침미다례가 백제에 순순히 귀복하지 않고 저항하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백포만의 포구 세력 신미[=침미다례]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까지 반백제적 성향을 견지하다가 남방으로 세력 확대를 본격화하던 백제에게 369년에 도륙당하고 말았다.

4세기 후반 이후 백포만 일대에서 의미심장한 고고학적 변화가 감지된다. 먼저 해남 군곡리 패총이 4세기 후반 이후에 더 이상 조성되지 않고 방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화산면 안호리평호리 일대의 고분 및 주거지 유적이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반까지 발전적 추세를 보이다가 4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소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369년 침미다례가 백제에 의해 도륙당한 이후 백포만 포구 세력이 급격히 쇠퇴한 정황을 보여 주는 고고학적 지표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백포만의 또 다른 지점에 해당하는 현산면 고현리 일대에서는 4세기 후반 이후에 인상적인 가야계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고, 그 인근에 죽금성, 읍호리토성, 고다산성, 백방산성 등의 성곽이 축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산면 일대는 오히려 발전적 추세를 이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4세기 후반 백제의 침미다례 도륙은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다기보다는, 송지면군곡리화산면안호리평호리의 세력 등을 대상으로 하여 선별적으로 타격을 가하고, 현산면 일대의 세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친백제 세력으로 포섭하여 활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세기 후반의 백포만 포구 세력, 탐라(躭羅)]

백포만의 고대 포구 세력은 사서에서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5세기 후반에 탐라 혹은 탐모라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등장한다. 이에 관한 기사는 『삼국사기』에 2건이 전한다. 480년에 탐라국이 백제에 방물을 바치니 백제 문주왕이 기뻐하며 그 사신에게 은솔(恩率)의 관등을 하사했다는 내용의 기사와 498년에 탐라가 공부를 바쳐오지 않자 백제 동성왕이 친히 정벌에 나서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그만두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 두 기사에 나오는 탐라와 탐모라는 흔히 제주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보기에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즉 498년 동성왕의 정벌군이 이르렀다는 무진주는 지금의 광주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백제군이 무진주(광주)에 이르렀다고 하여 바다 건너 제주 세력이 급히 사죄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더욱이 『일본서기』에는 508년에 탐라인(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했다는 기사가 나오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탐라는 508년 이전인 480년과 498년에 백제와 통하였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탐라 혹은 탐모라와는 별개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일본서기』의 탐라는 제주 세력으로, 『삼국사기』의 탐라 혹은 탐모라는 제주와는 별개의 세력, 즉 백포만 포구 세력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이 견해에 의거한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5세기 후기의 탐라 혹은 탐모라는 3세기 후반의 신미, 4세기 후반의 침미다례와 동일한 백포만 포구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위의 두 기사는 5세기 후기 백제와 백포만 포구 세력 탐라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백포만의 포구 세력[신미=침미다례=탐라]은 3세기 이후 백제에 대하여 적대 노선을 취하다가 4세기 후반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도륙’이라 표현될 정도의 대타격을 받았고, 그 이후 현산면 일대에서 세력을 근근이 유지해 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두 기사에 의하면 백포만 포구 세력 탐라는 480년에 돌연 백제에 방물을 바쳐 백제의 환대를 받더니, 498년에는 방물 바치는 것을 중단하여 백제의 무력 정벌의 위협을 받게 된 것으로 나온다. 이는 곧 백제와 백포만 포구 세력 탐라의 관계가 5세기 후기에도 여전히 불편하고 불안정한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자의 불안정한 관계는 백제의 쇠퇴와 왜 세력의 개입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서 촉발되고 설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백제는 5세기에 들어 장수왕의 고구려에게 크게 압도되고 있었다. 475년에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개로왕의 전사와 수도 한성의 함락이라는 충격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하듯 천도한 이후에도 문주왕과 동성왕 등이 잇따라 피살당하는 내환까지 겹치면서, 백제는 끝 모를 추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와 함께 왜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백제의 상황이 최악의 국면에 빠져들게 되자 그간 백제에 의지하여 중국과 관계를 맺어 오던 왜가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즉 『송서』와 『남제서』 등의 중국 측 사서에 의하면 5세기에 왜는 5대[찬왕, 진왕, 제왕, 흥왕, 무왕으로 이어지는 왜 5왕]에 걸쳐 중국 남조의 송과 남제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가야 등은 물론 백제까지도 자신의 군사적 영향력 아래 있다고 허위로 과시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 시기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왜는 영산강 유역 세력 집단과 긴밀한 교류를 전개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5세기에 들어 왜계 고분이 남해안을 따라 잇따라 출현하더니, 5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으로 집중되는 추세를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왜계 고분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는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10여 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추세를 웅변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관문적 위치에 있는 해남 지역은 5세기 후반 이후 왜계 고분이 가장 두드러지게 대두된 곳 중의 한 곳으로, 전방후원분도 2기나 확인된 바 있다. 이는 해남 지역이 왜와 특별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5세기 후반에 백제가 직면하였을 난처한 처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즉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전통적인 우호세력인 왜를 껴안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왜가 중국과 독자적인 교섭을 거침없이 진행하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 집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두 기사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백제가 백포만 포구 세력 탐라에 대하여 압박을 가하면서 한편으로 왜도 견제하기 위해 구사한 이중의 포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480년에 탐라가 백제에 방물을 바쳐왔을 때 크게 기뻐하며 제3위에 해당하는 최고위급 관등인 은솔을 사신에게 선뜻 내려 주며 과잉 반응을 보인 백제의 모습에서는 탐라가 스스로 기꺼이 공물을 바쳤다기보다는 백제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하였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498년에 탐라가 방물을 중단하자 백제가 즉각 무력 공격에 나섰고 탐라가 사죄하자 바로 공격을 멈추었다는 것에서는 백제와 왜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하던 탐라의 이중적 행태와 단호하지 못한 백제의 대응 방식을 살필 수 있다.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의 의의]

사서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의 모습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 흥미로운 일이다.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은 여러 사서를 통해서 3세기 후반에는 ‘신미’로, 4세기 후반에는 ‘침미다례’로, 그리고 5세기 후반에는 ‘탐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면서 그 존재를 보여 주고 있다. 이와 함께 고대 포구 세력의 근거지답게 백포만 일대에 패총의 유적이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영산강 유역 특유의 옹관고분과 함께 전방후원분을 위시로 한 다양한 왜계 고분, 그리고 백제계 고분 및 성곽 등 다채로운 고고학 자료가 시기에 따라 교대되어 나타나고 있어,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의 존재와 변화상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도 있다. 이러한 포구 세력의 존재는 백포만이 보유한 최적의 해양환경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은 백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우호적 혹은 적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백제의 위협을 저지하고 견제하기 위하여 3세기 후반에는 중국의 진(晉)에 집단적인 사신단을 파견하였는가 하면, 5세기에는 왜와 밀착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제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니, 4세기 후반에는 백제로부터 ‘도륙’당하는 참담한 시련을 겪었고, 5세기 말에는 다시 백제로부터 무력 공격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은 5세기 후기 『삼국사기』의 ‘탐라’를 끝으로 사서에서 그 존재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영산강 유역이 6세기 중반 경에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이에 따라 백포만 포구 세력도 색금현(塞琴縣)이라는 백제의 일개 지방으로 편제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자료 역시 이러한 추세와 부합하는 변화상을 보여 준다. 즉 영산강 유역 전역에서 왜계 고분과 토착의 옹관고분이 사라지고, 그 대신 백제식 횡혈식석실분으로 일원화되는 변화가 확인된다. 백포만 일대에서 백제의 성곽이 축조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백포만은 영산강유역 고대 세력집단의 관문적 기능에서 백제의 거점 포구로, 소속과 기능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백포만은 지금의 현산면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때 침명현(浸溟縣)으로, 고려시대에는 해남현으로 편제되면서 해남의 원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이후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르러 해남의 중심지가 지금의 해남읍으로 옮겨지면서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 이후 간척이 진행되어 백포만 고대 포구 세력의 근거가 되었던 바다의 상당 부분이 평야로 변신하여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에 사서와 고고학 자료를 망라하고 이를 콘텐츠로 활용하는 가칭 ‘백포만 고대 포구 박물관’을 건립하여 백포만 포구 세력의 존재 양태를 동아시아 해양사적 시각에서 복원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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