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71
한자 水軍鎭
영어공식명칭 Naval Pos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40년연표보기 - 수군진 전라수영이 목포의 당포에서 해남우수영으로 이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 - 해남군에 있는 모든 수군진 폐진
해남우수영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지도보기

[정의]

조선시대 전라남도 해남군 인근 바다에서 국방과 치안을 맡아보던 병선이나 수군이 머무르던 진지.

[개설]

조선시대 해남군 지역에는 건국 초기부터 어란달량 그리고 주량에 병선이 배치되었다. 1440년(세종 22)에는 전라수영이 목포의 당포에서 해남우수영으로 이전하여 오면서 해남은 전라도 바다를 관장하는 수군진(水軍鎭)의 본영이 되었다. 1479(성종 10)년에는 전라좌수영이 여수로 분리해 나가고 전라우도의 바다를 관장하는 전라우수영이 되었다. 달량진왜변 직후에 이진진에 이어서 1710년(숙종 36) 무렵 갈두진이 설진되었다. 갈두진은 1736년(영조 12)에 폐진되었으나 전라우수영을 비롯한 이진진어란진은 조선 말기까지 운영되다가 1895년 모두 혁파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 해남군 인근 바다에는 지키던 병선이나 군대가 배치되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왜구가 창궐하면서 조선의 남쪽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왜구로 인한 피해가 컸다. 왜구는 대마도 등을 근거지로 명나라와 우리나라에 출몰하여 노략질과 인명 피해를 입혔다. 섬 지역에서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는 봄철에 동남풍이 타고 바다를 건너와 침략하였다. 고려 말 왜구는 해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1359년(공민왕 8)에 침입하여 피해를 입혔다. 고려 정부에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14세기 중반에는 진도, 흑산도, 압해도, 장산도 등 섬에 설치된 군·현의 백성들을 내륙인 나주 땅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연안에 있는 군·현의 소재지를 북쪽의 내륙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해남현의 경우는 영암 땅 시종[당시는 나주]에 옮겨가 있던 진도군과 1409년 합병하여 해진군을 신설하고, 1412년 현산면 고현리에 있던 해남현의 읍치를 삼산면 녹산역 터로 옮겼다. 이 무렵 해남군 인근에는 수군의 병선이 배치되었다. 이것이 수군진 설치의 배경이다. 해진군의 남쪽 바다에 어란과 완도 간 물목인 달량에 병선을 배치하였다.

[관련 기록]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고려 말 1357년(공민왕 8)에 해남현에 왜구가 침입하였다[高麗恭愍王八年倭寇海南縣].”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전라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무안현(務安縣) 대굴포(大堀浦)에 있고, 달량(達梁)이 영암군(靈岩郡) 남쪽에 있으며, 중선 7척, 맹선(孟船) 2척과 군사 51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어란(於蘭)해진군(海珍郡)의 남쪽 삼촌포(三寸浦)에 있으며, 중선 4척과 군사 4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達梁在靈岩郡南, 領中船七艘, 孟船二艘, 軍五百十九名, 梢工四名. 於蘭在海珍郡南三寸浦. 領中船四艘, 軍四百八十名, 梢工四名].”라고 하였다. 또 1432년에는 목포의 병선이 황원의 남면 주량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이때 수군들은 육상에서 근무하지 않고 해상의 선상에서 근무하였다. 따라서 육상에는 별도의 수군진성을 축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병선의 이동이 잦았다. 병선이 이동하면 지명도 함께 이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의 목포와 군산 그리고 해남의 어란이 그러한 경우이다.

[수군진의 이동과 혁파]

전라북도 옥구에 있던 전라수영도 남쪽으로 전진하게 된다. 1408년 옥구는 해로의 중앙이 아니라는 지적에 따라 무안의 대굴포로 이전하였으나 대굴포는 배 대는 곳이 깊고 포구도 좁고 멀어서 적의 침략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1432년 무안현의 목포의 당포로 이전하였다. 1440년 다시 남진하여 연안해로상의 중요한 물목에 위치한 해남의 황원곶 지금의 우수영으로 정착하게 된다. 전라수영은 1479년에 전라좌수영이 분리되어 나가고 전라우도 바다를 관장하는 전라우수영으로 변화를 겪는다. 어란진의 경우도 화산 연곡리 고어란에서 어란도 섬을 거쳐서 지금의 송지면 어란리에 정착한다. 달량 만호진의 경우는 1522년 완도군 가리포로 이전되고 권관진으로 운영되다가 달량진성이 주변의 산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여 왜구에 노출되어 함락되자 달량진왜변 후 권관진도 인근의 이진으로 이설되었다. 또 1710년 무렵에는 관방과 제주도민의 진휼을 위하여 갈두진이 설진되었다가 1736년 폐진되었다. 해남군 지역에 설진되어 운영되던 전라우수영과 이진진과 어란진은 일제에 의하여 1895년에 모두 폐진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우수영의 관할에 있던 전라우수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을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7년 9월 명량대첩으로 조선을 구한 수군들도 사실상 전라도 수군이었으며 그 혁혁한 공은 전라우도의 수군 덕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호남]의 수군이 없었다면 국가도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였다. 명량대첩을 이룬 공간은 해남과 진도 간을 흐르는 울돌목과 해남의 전라우수영이다. 따라서 해남 지역에 설치된 수군진의 역할은 중차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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