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량진왜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87
한자 達梁鎭倭變
영어공식명칭 Dallyangjin Japanese Invasion
이칭/별칭 을묘왜변,달량진사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483년연표보기 - 달량진왜변 1차 침략
발생|시작 시기/일시 1552년연표보기 - 달량진왜변 2차 침략
발생|시작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달량진왜변 3차 침략
발생|시작 장소 달량진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달량진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지도보기

[정의]

1483년·1552년·1555년 세 차례에 걸쳐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달량진에 왜구가 상륙하여 침탈하였던 사건.

[개설]

달량진은 현재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수군진이다. 1406년(태종 6)에 이미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른 시기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달량의 원래 지명은 달도였는데 완도의 달도와 구분하려고 고달도(古達島)라 칭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전기에 잠시 해남현에 속한 수군진이었다가 영암으로 이속되었다. 이러한 달량진에 왜구가 1483년·1552년·1555년 세 차례 침략하였다. 이를 달량진왜변이라 한다.

[역사적 배경]

1429년(세종 11)의 “난량(蘭梁)의 병선[지금의 화산면 연곡리 어란에 정박하여 있던 병선]을 달량으로 옮기라.”라고 하였다. 달량포구 해상에 병선을 배치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달량에는 중선 7척, 맹선 2척, 선군 519명, 초공(梢工)[키잡이 사공]이 배치되었다. 달량 만호 수군진 성(城)은 1499년(연산 5) 무렵 축성이 되었다. 『연산군일기』 1499년 7월 12일 기사에 달량의 축성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장령 손번(孫蕃)은 “전라좌도는 적의 침략을 받는 가장 긴요한 곳이므로 마도(馬島)·달량(達梁) 등처는 금년에 쌓아야 한다.”라고 하자 연산군은 “축성에 관한 일은 마땅히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되, 다만 그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들이 그 과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후 1522년 왜구의 침략 시 달량진 성이 함락되었으므로 연산군 무렵에 관방성으로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수군진 상황]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달량진 주변만 보면 완도에 마도진[나중에 강진으로 이속], 장흥에 회령진, 해남에 어란진, 진도에 남도진 등이 있었고, 1440년(세종 22)에는 전라수영이 목포에서 우수영으로 옮겨 온다. 처음 설치된 수군진은 내륙 방어를 위하여 육지 안쪽에 있다가 왜구들이 서해안을 자주 침범하자 남쪽 해안으로 전진 배치가 되었다. 달량 만호진은 1522년에 완도의 가리포로 이전되고 권관진(權管鎭)으로 격하되어 운영되었다.

[경과]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에는 조선 정부가 무역 통제를 강화하고 일본에 대한 교역량을 줄이자, 일본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대마도 등의 일본 서부 바닷가 주민들이 달량진을 침범하게 되었다. 달량진에는 왜구가 1483년·1552년·1555년 세 차례 침략하였다.

첫 번째는 1483년(성종 14) 2월 말, 왜선 수 척이 달량과 청산도에 이르러 상선(商船)과 무명 50필, 쌀 30여 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명을 죽이고 일곱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두 번째는 1522년(중종 17) 6월에 왜선 12척이 깃발을 세우고 징과 북을 치면서 침입하였다. 왜인(倭人) 80여 명이 먼저 하륙하여 달량을 침범하였다. 왜적(倭賊)의 형세를 보건대 좀도둑들이 아니었다. 달량성(達梁城)은 견고하기는 하였지만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함락되었다. 산허리에다 성을 쌓아, 만일 적이 성 뒷산의 정상에 올라간다면 성 안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어 왜구는 장흥 회령포와 완도 가리포로 쳐들어가 침탈하였다.

세 번째는 ‘을묘왜변’ 또는 ‘달량진사변’이라고 한다. 1555년(명종 10) 5월 11일에 시작되었다. 달량진을 침략한 왜선은 70여 척에 왜구는 6,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진포와 달량진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민가를 불태웠다. 그리고 왜인들이 성을 6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병사와 군사들이 굽어보며 활을 쏘아 맞는 자가 많아지자, 왜인들이 큰 기(旗)를 성 밑으로 옮기어 꽂고 각각 방패를 지니고서 날뛰며 북을 치고 소리를 질러댔다. 성안의 사람들이 돌로 내리치자 기치(旗幟)와 방패가 더러는 부수어지거나 찢어지기도 하였다. 병사가 전세가 불리하여 성 위에서 화친(和親)하자는 글을 써 보내니, 왜인들이 성안에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도 다한 것을 알아차리고서 사다리를 타고 성으로 올라와 성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달량진성을 점령하고 나서는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남도포·금갑포, 완도군의 가리포, 강진군의 마도진, 장흥군의 회령포 외에 전라병영과 강진·장흥 등의 민가를 마구 침탈하였다. 당시 해남현감 변협만은 남도포만호 송중기(宋重器)와 함께 적은 수의 군사로 해남성을 지켰다. 그러나 왜구와 싸웠던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당시 조정에서는 변방의 성들은 바라만보고도 무너졌고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앉아만 있었으며 대신들은 비록 날마다 비변사에 모여 계획하였지만 하나도 시행할 만한 방책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결과]

조선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왜구 토벌에 나섰다. 영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의 수급 100여 급을 베자 비로소 왜구들은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현재의 강진군 작천면과 강진읍 일대를 분탕질하고 바다로 나감으로써 달량진왜변은 끝이 난다. 왜구가 물러간 후 쓰시마[對馬]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고 세견선의 부활을 거듭 요청하였으므로 정부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고,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남해 연안이 왜구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건들이었다. 방어 계책도 없고 싸울만한 준비가 없었다. 달량진왜변을 겪고서도 조선 조정에서는 적절한 왜구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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