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두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72
한자 葛頭鎭
영어공식명칭 Galdu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710년연표보기 - 갈두진 설진
폐지 시기/일시 1736년연표보기 - 갈두진 폐진

[정의]

조선 후기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에 설치되었던 수군진.

[개설]

갈두진(葛頭鎭)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설치된 진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관방은 지리적으로 취약하였으며 제주도민의 진휼(賑恤)을 위한 목적이 강하였다. 당시 제주도민 진휼곡은 나주의 제민창에 보관하였다가 제주도 해산물과 바꾸어 가도록 하였으나 뱃길이 멀어 가까운 갈두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갈두진은 1710년 무렵에 땅끝 마을 갈두산 자락에 설진되었다. 나주의 병선을 1척을 옮겨와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웃에 어란(於蘭)이진(梨津)이 있고 관방의 기능이 약하여 혁파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으며, 1736년에 결국 폐진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에 어란달량(達梁) 사이는 거리가 멀어 관방이 허술하니 진보(鎭堡)를 새롭게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의하면, 1478년 7월 조정에서는 전라도 관찰사와 절도사를 지낸 이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달량·어란 등지의 해변에는 거민(居民)[일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 매우 많으나 본 고을의 성(城)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 의지할 만한 곳이 없으니, 그 사이에 보를 쌓아야 한다는 찬성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신설에 대한 의견은 다른 수군진의 수군을 차출하여 배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정창손과 한명회 등의 의견에 따라 채택되지 않았다. 17세기에 이르러 남해의 여러 섬 지역에도 수군진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갈두진의 설진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내용]

갈두진은 여러 고지도와 기록 등에서 확인된다. 18세기 무렵에 그려진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팔도지도(八道地圖)』 등의 영암군편 지도에 등장한다. 갈두진의 위치는 어란이진 사이에 있는 지금의 송지면 송호리 땅끝 갈두마을 자리에 수군진으로 그려져 있다. 갈두진의 첫 설진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1710년 무렵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16년 10월 19일 “제주의 진휼을 위하여 잡곡을 제주로 들여보내고 대신 제주의 해산물을 갈두진으로 보내어 본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과 『숙종실록(肅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1719년 4월 30일 우의정 이건명이 “전라도에 새로 설치한 진보 중 갈두진갈두산 자락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어 갈두진의 혁파 논의가 시작되었다. 우의정 이건명은 “윤번군사가 190명인데 운영이 곤란하며, 근처에 이미 어란이 있으므로[葛頭鎭則近處, 旣有於蘭] 혁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어 1719년 5월 2일에도 “신설된 갈두진은 영암(靈巖) 땅에 있으며 비록 요해처라고 하나 어란이진과 대치하여 서로 가깝고, 신설한 뒤 아직 모양새를 갖추지 않았으니 혁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결론은 “우수사(右水使) 등에게 상황을 물어내리자.”라고 하였다. 이어서 1723년(경종 3) 7월에는 전라감사가 이르기를 “갈두산(葛頭山)의 경우 이미 목을 거머쥐는 곳이 아니고, 또 배를 숨겨 둘 곳이 없으니 혁파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1736년 9월 25일에 또 한 차례 혁파 논의를 거친 다음 결국 갈두진은 혁파되었다. 『비변사방안지도(備邊司方眼地圖)』의 주기에 따르면 “병진년[1736년]에 혁파되었다”. 이어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1738년(영조 14) 5월 7일에는 갈두진이 혁파되었으므로 갈두진에 이속된 나주의 병선 1척은 원래대로 나주로 환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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