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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64
한자 海南美黃寺大雄殿
영어공식명칭 Haenam Mihwangsa Daeungjeon
이칭/별칭 해남 미황사 대웅보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서정리 1] 미황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호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749년연표보기 - 해남 미황사 대웅전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601년 - 해남 미황사 대웅전 재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60년 - 해남 미황사 대웅전 중창
개축|증축 시기/일시 1754년 4월 - 해남 미황사 대웅전 복원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2년 - 해남 미황사 대웅전 보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2년 - 해남 미황사 대웅전 지붕부 이상으로 해체 복원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4월 1일연표보기 - 해남 미황사 대웅전 보물 제947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해남 미황사 대웅전 보물로 재지정
현 소재지 해남 미황사 대웅전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서정리 1]지도보기
성격 불전|전각
양식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미황사
관리자 미황사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조선 후기 미황사의 중심 불전.

[개설]

해남 미황사 대웅전(海南美黃寺大雄殿)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조선 후기 미황사의 중심 불전이다. 1988년 4월 1일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미황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위치]

미황사달마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달마산을 배경으로 입지한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지형 조건에 순응하여 서향으로 배치하였다. 사찰의 입구로부터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급한 경사를 이룬 대지의 지형을 다듬어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미황사의 중심 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뒤쪽에 축대를 쌓아 대웅전을 세웠고, 마당의 좌우에는 세심당과 향적전이 있다. 대웅전 옆에는 명부전이 대웅전을 향해 서 있고, 대웅전의 맞은편에는 자하문이 마당보다 2단 낮은 곳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영역은 마당이 넓고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있어 개방적인 느낌을 준다. 대웅전 뒤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달마산의 기암괴석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경내 중앙에 있으며 미황사의 중심 불전이다.

[변천]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達摩山美黃寺大法堂重修上樑文)」[1754]에 의하면 749년(경덕왕 8) 의조화상(義照和尙)이 미황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는 중국에 절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도 사세를 유지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3차례에 걸친 중창불사를 통해 많은 건물들을 세웠으나 1842년부터 갑자기 쇠락하면서 대웅전과 응진당을 비롯하여 몇 동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

1982년 대웅전과 응진당의 보수가 있었다. 1982년 대웅전 지붕부 이상으로 해체 복원 공사 때 종도리에 기록된 묵서명에서 3차에 걸친 중창 사실을 확인하였다.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에서 정유재란[1597]을 겪으면서 전각이 불타 없어지자 전각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대웅전은 미황사의 1차 중창 때인 1601년 재건되었다. 1598년(선조 31)에 산역(山役)하고 1600년에 상량하여 1601년에 공사를 마쳤다.

제2중창은 1659년(효종 10) 비구 성간(省侃)이 화주가 되어 2년여에 걸쳐 번와 보수를 하였다. 1658년에 산역을 하고 1660년에 기와를 굽고 대들보를 올려 마무리하였다.

현재의 대웅전은 미황사의 3차 중창이 끝난 1754년(영조 30) 다시 지은 건물이다. 1751년부터 금고(金鼓)를 만들기 시작하여 1752년 봄에 완성하였다. 1752년 봄여름으로 기와를 굽고 1753년 겨울 10월에는 보길도에서 산역을 하였고, 또 해남 은소(銀所) 북쪽 골짜기에서 새로 주춧돌을 만들어 역사(役事)를 준비하여 동시에 운반하여 왔다. 대둔사와 여러 촌락이 역사를 도와서 1754년(영조 30) 춘정월 나한전과 대웅보전을 일시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나한전은 3월 26일에 대들보를 올리고, 대웅전은 4월 11일에 대들보를 올렸다. 1822년(순조 22) 중수하면서 단청을 새로 하고 삼존불상의 금칠도 다시 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가 있었으며, 1981년부터 이듬해까지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면서 창호와 지붕부 일부를 변경하였다.

[형태]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기단은 축대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주춧돌은 자연석과 문양이 있는 가공주춧돌을 함께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기둥으로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공포는 외3출목에 내4출목 구조이다. 정면과 배면은 매 칸마다 2조의 주간포(柱間包)를 배열하였고 양 측면은 매 칸마다 1조의 주간포를 놓았다. 첨차는 하단을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이다. 1~4제공은 바깥쪽 하부에 모두 연봉을 조각하였는데 1·2·3제공은 바깥 끝이 하늘로 향하는 앙서형(仰舌形)이며 4제공은 익공형(翼工形)이다. 보머리와 주간포의 5제공은 봉두(鳳頭)로 꾸몄다. 내부에서는 1~4단 제공을 일체형으로 초각하였고, 5·6·7제공은 각각 연꽃·연봉·봉두로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한편 배면 어간에 사용된 공포는 모습이 다르다. 1~3제공은 교두형이고 주상포의 4제공은 익공으로 하부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보머리와 주간포의 4·5제공은 운공형(雲工形)이다. 이러한 공포의 모습은 1597년 건립된 응진당에서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1660년 중창 때 만든 것을 1754년 중창 때 재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1고주 5량 형식이나 실제로는 5량 구조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고주는 평기둥보다 지름이 큰 것을 사용하고 종보를 받치지만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고주가 평기둥보다 지름이 훨씬 작고 대들보와 툇보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주는 불단 앞 예불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측면 기둥열에서 뒤쪽으로 물려 세웠다. 대들보와 툇보는 마치 한 부재처럼 사용되어 있는데 연결되는 지점에 고주가 받치고 있다. 대들보 위에는 화반대공을 십(十)자로 짜서 종보와 종도리를 결구하였고 종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충량은 4개가 사용되었는데 대들보 위에 걸치는 부분은 직절(直切)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천장은 우물 정(井) 자 모양인 우물천장인데 중도리 바깥쪽은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빗천장은 일반적으로 널판을 사용하지만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빗천장도 귀틀과 반자를 모두 갖춘 우물천장을 갖췄다. 불상이 모셔진 가운데 부분은 소란을 갖춘 우물천장으로 구성하여 위계가 높음을 강조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사자상, 극락조, 불단 위의 위패, 정(丁) 자 모양의 닫집이 있어 한층 장식적이다.

내부 공포의 형태도 연화당초형으로 만들고 위에 날개를 펴거나 접고 앉은 극락조를 입체적으로 조각하여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은 여수 흥국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강화 전등사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는 조선 중기 이래의 독특한 장엄 법식이다. 바닥은 귀틀과 청판으로 구성 된 우물마루를 깔았고 불단 위로 닫집을 설치하였다. 측면의 평주열보다 약간 뒤로 몰린 위치에 내부 고주를 설치하고 여기에 의지하여 후불벽을 구성하였다. 후불벽에는 탱화를 걸었으며 중앙불단에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모셨다. 각종 단청 문양은 대부분 비단에 그려서 붙여진 것으로 고색을 띠고 있다. 특히 대량에 그려진 천불도, 포벽 내부에 그려진 나한도, 내부 고주에 생동감 있는 용문 등은 실내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전면의 어간 양측 기둥머리에는 용두(龍頭)가 달려 있어 화려한 느낌을 준다. 단청은 칠이 벗겨져 거의 없는 상태이다. 창호는 4면에 모두 두었다. 정면 가운데 칸에 4짝 솟을 빗살무늬를 달았으며 양 협칸에는 빗살무늬 3짝문을 그리고 후면의 어간, 협간에도 2짝문을 달았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공포에 사용된 제공의 형태와 정면 어간의 용두 등이 1765년 세워진 불국사 대웅전과 매우 유사하다. 해남 미황사 대웅전 중창공사에 참여한 상편수 쾌행(快行)은 1781년 불국사 자하문(紫霞門)을 건립할 때 우편수로 참여하였고, 1785~1786년 기림사(祗林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을 개조 중수할 때 도편수를 역임한 인물이다.

구조적인 특징은 대들보와 툇보를 맞보 형식으로 걸고 하부에 고주를 세워 받친 것과 서까래의 구성 방식을 들 수 있다. 서까래는 중도리와 외목도리 사이에 긴 서까래를 걸었고, 중도리 위에 다시 덧도리를 올리고 짧은 서까래를 올렸다. 이러한 구조는 지붕부의 무게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일부 서까래에서는 끝부분을 타원형으로 치목하는 옛 수법도 보인다. 특히 연봉우리와 만개한 연꽃, 거북, 게 등 특이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가공주춧돌은 다른 건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미황사의 부도에서도 나타나는 문양들이며 바다와 가까운 미황사의 입지적 성격으로 인한 불교의 민중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주춧돌 위에는 민흘림을 둔 원기둥을 세웠는데 우주는 평주보다 약간 굵은 반면 기둥을 높게 하지 않고 초석을 높여 귀솟음을 처리하였다. 안오금과 그랭이 등 전통적인 기법들이 모두 보인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석가삼존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법당 안에는 소종과 법고, 법고대, 괘불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천장에는 범어[인도 산스크리스트어]로 쓰인 글자와 천불의 벽화가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특히 천장 곳곳에 그려진 천불의 벽화 때문에 해남 미황사 대웅전에서 세 번만 절을 올리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미황사 창건 설화에 나오는 배[인도에서 경전과 부처상을 싣고 온 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반야용선의 의미도 있는데 이는 중생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배를 상징하기도 한다.

건물 외부의 단청은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씻겨 지워졌지만 귀목나무 특유의 거친 질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이 묵서된 상량목은 대웅전 뒤쪽 벽에 놓여 있다. 1727년(영조 3) 괘불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괘불 출입문을 대웅전 향 좌측 측면에 설치하였다. 안에는 구 후불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독성탱화·산신탱화[1943]·신 후불탱화[1993] 등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괘불지주와 배례석이 있다.

[현황]

해남 미황사 대웅전 건물은 전체의 보존 상태가 완전하며 현재도 종교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1988년 4월 1일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감시 장치[CCTV]를 설치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관리는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에서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해남 미황사 대웅전은 1754년 세워진 불전으로서 평면의 구성, 공포의 장식성과 내출목이 외출목보다 많은 것, 화려한 단청, 우수한 조각 수법 등에서 18세기 이후 불전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배면 어간에는 1660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어 공포의 시기별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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