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882
한자 佛敎
영어공식명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인선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하는 종교.

[개설]

해남의 불교문화는 그 지리학적 특성상 창건 설화에 해로가 많이 등장한다. 또한 해남의 각 사찰은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거의 모든 사찰이 서남해안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해남의 불교는 현재 전해지는 불교문화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해남의 불교문화는 조선시대에 그 자취가 뚜렷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휴정(休靜)[1520~1604] 서산대사의 교시에 따른 호국적 경향이 해남의 대흥사미황사, 서동사 등에 강하게 남아 있다. 또한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 화엄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사상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였으며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찰이 대흥사미황사이다. 두 사찰의 부도전에 세워진 선사와 강백들의 승탑은 동물상들이 새겨진 점과, 고승대덕의 승탑을 장엄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어 독특하고도 이색적이며, 조선시대 해남 불교문화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의 불교 유적들도 해남 곳곳에 남아 있으나 현재 전하는 문헌자료가 거의 없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기 해남의 불교]

해남을 대표할 만한 사찰인 대흥사의 창건 설화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에 따르면 426년(구이신왕 7)에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가 대흥사의 암자인 만일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635년에 지어진 『죽미기(竹米記)』에는 514년(법흥왕 1)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도 전해진다. 또 895년(헌강왕 11)에 신라 말의 영암 출신 도선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중 하나라는 설도 있다.

호남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 후반 중국 동진에서 온 서역승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에 전하였다는 불교 도래설이 있으나 전라남도 지역의 불교문화는 8세기 신라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9세기 신라하대 이후 서남해안이 중국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을 이용한 국제무역의 중요 지역으로 부상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비는 한편 해상 세력의 결속을 다져 줄 사찰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방 호족 세력의 후원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규모의 마애불로는 보성 유신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44호]과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이 있는데 전라남도 3대 마애불로 불린다.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새긴 불상으로 한국의 마애불은 산천의 8부 능선 정도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미륵으로 불리면서 고유의 한국적인 특징을 갖는다. 대흥사 북미륵암에는 마애불과 두 탑이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배치되어 있는데, 두 탑이 마애불의 좌우에 놓여 있는 배치는 흔하지 않다. 미황사 창건 설화에는 8세기 중엽 인도에서 불상과 경전을 싣고 온 배를 맞이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불교의 해로(海路) 유입과 불교의 북방전래설과 반대되는 남방전래설을 암시하고 있다.

[고려시대 해남 불교]

고려시대 불교문화를 이야기할 때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을 간과할 수 없다. 철불이라는 재료는 신라하대에서 고려 초에 걸쳐 100여 년 동안 주요 선종 사찰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858년에 무주장사(武州長沙)[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조성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과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이 있는데 보림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이고 실상사는 실상산문으로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전라남도의 주요 철불은 이 두 철불과 함께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이 꼽힌다. 따라서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초 해남 지역에서의 선종의 활동을 뒷받침한다. 이외에 고려시대에 해남 대흥사 만일암지 오층석탑이 조성되었고, 고려시대에 진정국사가 대흥사 북미륵암에 주석하였다는 기록이 『대둔사지』에 전해진다. 또한 『신동국여지승람』에 대흥사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세 고승의 부도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등 고려시대에 해남에서 불교가 성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해남 불교]

조선 전기 해남군의 불교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해남 맹진리 암각 매향비가 있다. 해남 맹진리 암각 매향비에는 죽산현(竹山縣)[지금의 해남군]의 동쪽 좌구포(座具浦)에 미타 향도(彌陀香徒) 58명과 상당마을 주민 100여 명이 함께 모여 매향(埋香)을 하였으며, 매향비는 1406년(태종 6) 3월 23일에 세웠고, 매향 의식은 법각(法覺)의 주관 하에 혜관(惠觀) 등이 참여하였다고 쓰여 있다. 조선 전기 해남 지역에 불교가 민중 깊숙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해남 지역 불교도의 호국 활동은 서산대사 및 승병(僧兵)의 공훈을 기려 정조가 표충사의 편액을 친히 써서 하사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648년에 조성된 해남군 도장사의 복장 유물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소요(逍遙) 태능(太能)과 벽암(碧巖) 각성(覺性)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승병이자 대선사였던 이들의 이름이 확인된다. 발원문에는 ‘1633년 곤륜산 대흥사에서 개판’하였음이라고 적혀 있다. 대흥사대둔사란 옛 이름이 있는데 조선 후기에도 대흥사로 불렸음이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서산대사의 문도로 이루어진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들은 해남 지역 불교문화의 위상을 약진시켜 조선 후기 교학의 발전과 그 대중화에 기여한 바가 컸다.

휴정은 중국 선종 종파인 임제종을 이었는데 13대종사는 풍담(楓潭)[1592~1665]에서부터 초의(草衣)[1786~1866]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에 대흥사미황사를 거점으로 하는 사찰 문중의 핵심적 인물들이다. 13대강사는 소요의 후손과 10대 대종사 호암(虎巖)[1687~1748]의 제자가 다수를 이루는 13인의 강백을 이른다. 대종사들은 사부대중이 모이는 화엄대회를 개최하였고 대강사들은 강사 중심의 강회를 이끌었다. 대흥사는 이러한 활동의 종원(宗院)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승보사찰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말기 해남의 불교문화 가운데 가장 뚜렷한 행적은 선(禪)과 차[茶]의 세계가 하나라는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으로 쇠퇴해 가던 우리 차의 부흥을 이끌었던 초의선사의 선사상이다. 초의선사는 선학과 교학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진리를 찾는 수행을 하였다.

[현대 해남 불교]

2018년 현재 해남군에는 29개의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가 있다. 조계종 사찰이 8개소, 태고종 사찰이 7개소, 화엄종 사찰이 1개소, 법상종 사찰이 2개소, 기타 사찰이 11개소이다. 신도는 대흥사미황사가 많은데 모두 조계종 사찰이다. 2009년에 사적 508호로 지정된 대흥사에서는 불교대학과 불교대학원을 20여 년 전부터 운영하여 1,3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외에도 매년 초의문화제를 개최하여 한국 차 문화 발전과 중흥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명맥이 끊어졌던, 임진왜란 당시 호국정신을 실천한 서산대사를 기리는 서산대제를 2012년 복원하여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면서 서산대사의 가르침과 호국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해남 대흥사는 2018년 6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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