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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18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Histo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종안

[정의]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역사.

[행정 구역의 변천]

해남이 지금과 비슷한 경계를 갖게 된 것은 1448년(세종 30)으로 올라가며, 1895년에 해남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접 지역을 병합하면서 13개 면이 되었다. 13개 면은 해남면(海南面)·삼산면(三山面)·화산면(花山面)·현산면(縣山面)·송지면(松旨面)·북평면(北平面)·옥천면(玉泉面)·계곡면(溪谷面)·황산면(黃山面)·마산면(馬山面)·산이면(山二面)·문내면(門內面)·화원면(花源面)이다.

1955년 7월 1일 해남면이 해남읍으로 승격되어 1읍 12면이 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 북평면북평면북일면(北一面)으로 분면되어 1읍 13면이 되었다. 리(里)의 경우 인접 읍면 간의 조정이 있었다. 2018년 11월 1일 현재 해남의 행정구역은 1읍 13면 177개 법정리와 514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해방 후의 혼란과 6·25전쟁]

해방은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치안을 회복하기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해남지부가 조직되었고, 인민위원회 해남지부로 개편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해남지부인민위원회 해남지부의 주축은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인사들이었으며, 이들은 1946년 초까지 실질적으로 해남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고 좌익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좌우익의 갈등은 해방 초 인민위원회의 소작료 불납운동으로 격화되었으며, 1946년 해남 추수봉기로 인해 절정으로 치달았다. 남로당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자들은 경찰서와 지서를 습격하여 우익인사들을 살해하였다. 진압을 위하여 투입된 경찰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동조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해남 추수봉기의 주도자들이 이미 산으로 떠난 후에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산 근처에 살던 민간인들은 낮에는 경찰, 밤에는 빨치산에게 시달리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1950년 8월 15일 북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과정에서 해남은 경찰 후퇴기–인민군 점령기–경찰 수복기의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의한 보도연맹원 학살, 인민군에 의한 우익 학살, 경찰에 의한 부역자 처벌로 인하여 수많은 해남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전쟁 이후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전쟁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마을에서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해남을 떠나야만 했다.

[경제개발과 해남의 인구 유출]

1960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반공이데올로기와 근대화를 통치 목표로 내세우면서 경제 발전 정책을 추진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1981년까지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정부의 경제 발전 계획에 따라 경제는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경제 성장에 따른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도농 간의 격차, 인구의 도시 집중 등 여러 사회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해남 또한 마찬가지였다. 1차 산업 위주의 산업 구조에서 도시들과의 격차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은 매년 급증하였다.

1960년 해남의 인구는 약 20만 4000여 명에서 1966년이 되면 22만 9000여 명으로 증가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급감하기 시작한다. 1970년 21만여 명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며, 1975년은 19만 8000여 명으로 2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1980년이 되면 15만여 명으로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1990년 13만 3000여 명, 1995년 10만 4000여 명이 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인구 1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민주화에 대한 군민의 열망]

경제 개발 과정에서 우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한편으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커져 갔다.

1960년 4·19 희생자 및 부상자를 위문하기 위해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기부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하였다. 해남에서 4·19 시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4·19혁명에 대한 해남 사람들의 공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해남의 민주화 열망과 관련하여 들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김남주이다. 해남에서 태어난 김남주는 전남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면서 유신반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2년 말 『함성지』 사건으로 인해 옥살이를 하였고, 출소 이후에는 고향인 해남에서 황석영 등과 함께 문화운동을 벌였다. 1978년 다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활동으로 인해 1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88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1994년 2월 18일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김남주는 시로써 목소리를 냈으며, 스스로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 칭하였다.

해남의 민주화 열망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80년 5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전개된 해남 5·18이다. 민주화에 대한 광주 시민의 요구에 신군부는 무력으로 응답하였다. 광주의 항쟁 소식은 24일 해남으로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해남 군민들은 즉각적으로 조직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해남 군민들은 군민광장 앞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하라”를 외쳤으며, 해남 각지와 완도로 항쟁 소식을 알렸다. 5월 22일부터는 무기를 탈취하여 무력시위를 전개하였으며, 23일 우슬재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진압군과의 산발적 전투가 24일까지 계속되었다. 해남 5·18은 해남 군민들이 민주화를 얼마나 열망하였는지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방자치 이후의 해남]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2018년 현재 민선 7기가 순항 중에 있다. 현재 해남군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노령인구의 증가와 인구 감소이다. 2018년 6월 해남의 인구는 7만 2743명으로 매달 수백 명씩 감소하고 있다. 반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수는 2만 1829명으로 전체 인구 감소 폭보다 적은 편이다. 고령 인구 비율은 30%까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구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 해남군에서는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을 시행하여 왔다. 2008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보건소에 출산정책팀을 꾸렸으며, 최초로 출산 장려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또 2015년 9월 전라남도와 함께 공공산후조리원을 만들어 출산 환경을 개선하였다. 그 결과 2018년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이 1.21명일 때 해남은 2.43명으로 두배 높은 출산율을 보이고 있으며, 6년 연속 전국 합계 출산율 1위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있는 해남의 정책은 전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례로서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배우고 있는 상황이다.

민선 7기를 맞아 해남은 한 단계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빛나라 땅끝! 다시뛰는 해남”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1. 현장 중심 소통 행정, 2. 살기 좋은 부자 농촌, 3. 체류하는 문화관광, 4. 생동하는 지역경제, 5. 감동주는 맞춤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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