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24
한자 海南地域國民報道聯盟圓集團虐殺事件
영어공식명칭 Haenam Massacre of the Members of Converted anti-Communist Group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07월 16일연표보기 - 해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사건 해남 보도연맹원 갈매기섬 학살 사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07월 22일연표보기 - 해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사건 해남 보도연맹원 화산면 해창리 학살 사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09월 12일 - 해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사건 갈매기섬 유족회 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11월 27일 - 해남 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집단 학살 사건 해남군유족회 결성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김홍배|오홍탁|김정수|전남운동협의회|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해남지부|인민위원회 해남지부

[정의]

1950년 7월 경찰의 예비검속에 해남 지역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한 사건.

[개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9년 6월 15일 좌익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좌익 세력 색출 및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1949년 12월 13일 전라남도에서도 국민보도연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후 각 군별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며 예비검속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하였다.

[역사적 배경]

해남은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33년 5월 해남·완도의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가 조직되었으며, 해남에서는 김홍배, 오홍탁, 김정수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해남지부, 인민위원회 해남지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946년 11월 전개되었던 해남 추수봉기를 전남 최대의 봉기로 이끌었다. 해남 추수봉기에 참여하였던 인사들 대부분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경과]

1949년 12월 13일 이후 해남에서도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 대부분은 1946년 해남 추수봉기에 참여했던 이들이었으며 그 수는 6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지역별 할당제에 따라 사상범이 아닌 사람들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발발 이후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해남경찰서는 해남의 보도연맹원들을 7월 16일·22일 두 차례에 걸쳐 학살하였다.

해남의 북부 지방인 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산이면, 화원면, 삼산면의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6월 말에서 7월 초 경찰지서에 연행되거나 지서로 출두하여 해남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7월 16일 화산면 해창항에서 배에 태워져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하였다. 남부 지방인 현산면, 북평면, 북일면, 송지면의 보도연맹원들은 송지지서와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7월 16일 송지면 어란항에서 배에 태워져 갈매기섬에서 총살되었다.

갈매기섬에서의 학살 사실은 극적으로 박상배[산이면 금호리], 박태운[산이면 업자리], 김영모[현산면 안평리], 고광열의 형[북평면 용운리] 등에 의해서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접한 유가족들에 의해 1950년 7월 말에서 9월 말까지 시신 수습이 이루어졌다. 산이면 상공리동복오씨 집안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1933년의 전남운동협의회 참가자들이었다. 동복오씨 집안은 1964년에 들어서 우여곡절 끝에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한편 1950년 7월 16일 갈매기섬에서의 학살 사건이 있은 후에도 한 차례의 학살 사건이 더 있었다. 보도연맹원 및 좌익활동가를 둔 가족들이 연행·소집되어 해남읍에 있는 해남식량영단 창고에 구금되었다. 그중 일부는 1950년 7월 22일 화산면 해창리에서 학살되었다. 이들의 학살 사실은 구금 중 희생되지 않고 7월 23일 풀려난 사람들에 의해 알려졌고 유가족들에 의해서 시신이 수습되었다.

하지만 두 사건에서 정확히 몇 명이 희생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증언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갈매기섬에서는 최소 100여 명, 화산면 해창리에서는 최소 수십 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두 사건 이외에도 독자적으로 학살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전체 몇 명의 보도연맹원이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결과]

해남의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그중에서도 갈매기섬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박문규 진도문화원장에 의해서다. 2001년 10월 갈매기섬 학살사건을 접한 박문규는 직접 답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후 2002년 6월호 『말』지를 통해 소개되었고, 『해남신문』과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에 의해 공론화되었다. 2002년 9월 7일 『해남신문』과 진도문화원 공동으로 갈매기섬 답사가 진행되었다. 유족 12명과 목포MBC, 6·25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관련자, 진도문화원 등 총 35명이 참가하였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섬을 방문, 천도제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이날 답사에 참여한 12명을 중심으로 해남·진도유족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2003년 11월 27일 갈매기섬 사건을 포함한 6·25전쟁 당시 해남 지역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이 모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해남군유족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10년 동안 해남에서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의 유족 찾기와 피해자 신청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379명이 정부로부터 진실 규명 결정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이 언제 적과 동조할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것도 정당한 절차 없는 엄연한 불법행위였다. 이러한 정부의 범법 행위로 해남의 보도연맹원들은 진도 갈매기섬과 화산면 해창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 갔으며, 경찰은 그 시신조차 함부로 못 찾게 하였다. 2005년 출범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상은 다행히 규명하였지만 전체 희생자 수, 유가족들에 대한 파악은 안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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