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48
한자 高麗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한정훈

[정의]

서기 918부터 서기 1392년까지 존속하였던 고려시대 해남 지역의 역사와 문화.

[군현의 구성과 변천]

해남 지역에 사용되던 군현 명칭은 고려 초기에 새로이 바뀌었다. 통일신라 시기 양무군(陽武郡)[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 관할의 고안현(固安縣)[마산·산이 일대]·침명현(浸溟縣)[현산·화산 지역]·황원현(黃原縣)[화원반도]이 죽산현(竹山縣)[마산 일대]·해남현(海南縣)[현산 일대]·황원군(黃原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 고을은 인접한 영암군이 고려 건국에 밀접한 관련이 있어 성장하였기 때문에 영암군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양무군이 도강군으로 명칭을 달리하여 영암군의 관할을 받게 된 것도 큰 변화이다.

고려시대 해남 지역에 설치된 고을은 황원군·해남현·죽산현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었다. 황원군·해남현·죽산현은 나주목을 계수관으로, 영암군과 영속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군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속현의 향리가 지방통치를 맡았다.

해남 지역 내의 지방 행정구역에 관한 주요 내용을 언급하면 아래와 같다. 해남현은 고려 말 왜구의 창궐로 인하여 서남해 지역이 혼란스러워지자 공도정책의 일환으로 진도현이 1350년(충정왕 2)에 해남 땅으로 옮겨 왔다. 이어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해남과 진도가 합해져 해진군(海珍縣)이 되었다. 황원군은 통일신라 시기 황원현이었는데, 고려 초에 영암군에 영속되면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군으로의 승격은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에 관여한 것이 이유일 것이라 추정한다. 해남 지역 고을 중 황원현만이 군으로 승격한 것을 화원반도의 자기 가마터와의 관련성을 강조한 견해도 있다. 이외에도 해남 지역에는 북평향, 송지부곡·팔마부곡·신갈부곡, 마봉소 등의 특수 행정구역이 다수 분포하였다.

[해양 교류활동]

고려시대에 해남 지역의 해상 항로를 통한 문화 교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중국 남송과의 잦은 사신 왕래나 신안 해저 유물선 발견과 같은 예들이 그러한 사정을 입증한다. 현재의 화산면 관동리관두량(館頭梁)이나 진도의 벽파진은 당시 대중국 교역의 출항지·기착지로 이용된 곳이다. 이밖에 미황사진불암의 연기 설화 중 불교의 해로 유입설화, 산이면 도요지와 화원 도요지 그리고 강진 청자문화의 발달 등도 해남의 해상 교역 활동과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해남과 진도 사이의 ‘명량항’의 해상 길목은 개경으로의 각종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로로 이용되어 국내외를 막론하고 문화가 이동되고 교류되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삼별초 항쟁과 해남]

삼별초군이 1270년(원종 11) 8월에 진도로 입도하자, 여몽연합군은 진도 벽파진을 보라보는 황산면 삼지원과 이웃하는 부곡리 춘정마을을 삼별초와 대치할 거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김방경과 몽고장수 아해(阿海)가 삼지원에 병력을 주둔하고 여러 날을 포진한 기록을 통하여 삼지원이 여몽 연합군의 대진도 공략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해남 지역에 삼별초나 김방경과 관련한 내용은 과거 해남읍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춘정마을과 삼지원 등지에서 구전 형태로 전하고 있다. 황산면 원호마을 국사봉 부근에는 장군바위전설이 전한다. 김방경과 아해가 이끈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을 때에 김방경은 삼별초군에 포위되어 바다에 투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동무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면서 다시 대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한 후 일시에 진도를 공격하였다. 이때 김방경은 국사봉에 올라 이 싸움을 종결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제사를 지낸 것으로 전한다. 또한 진도의 삼별초는 육지에서 쳐들어오는 여몽연합군에 결사항전하기 위하여 진도 용장성에서 북쪽 방향으로 약 20㎞ 직선거리에 있는 황산면 우항~관두~송호~만년마을 앞 약 2㎞ 거리에 장성(長城)을 급하게 축조하였다. 이러한 평지형 토성의 흔적이 송호마을에 남아 있다.

[왜구의 침략과 해남]

1350년(충정왕 2)에 왜구의 침략과 공도 조치에 따라 진도 사람들이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와 태간리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1409년(태종 9)에 이르러 진도 사람들을 고향과 조금 더 가까운 해남 삼산면 서쪽으로 다시 이주시키고, 해남과 진도를 합해 해진현이라 불렀다. 진도 사람들은 정착하였던 삼촌면의 면소재지는 현재 삼산면의 송정마을이었다. 그리고 세종 때는 대부분의 진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일부만이 그대로 해남에 남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해남 삼촌면을 진도군의 월경지로 남겨 두었다. 500여 년 동안 삼촌면은 각종 조세를 진도에 납부하였고 진도로 향하는 관문은 어성천 하구에 있던 삼촌포였다.

고려 말·조선 초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지역민의 불안한 모습은 마산면 맹진리 속칭 장군바위에서 발견된 1406년의 해남 맹진리 암각 매향비[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에도 잘 나타난다. 왜구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당한 것과 관련하여 미래 구복적인 매향의식이 성행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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