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5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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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實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규대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김실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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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김실광, 영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정규하(丁奎河) 등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킴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30일 - 김실광,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 김실광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김실광,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실광,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강원도 강릉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강릉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실광(金實光)은 1895년(고종 32) 강원도 강릉시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8일 1시경 영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정규하(丁奎河) 등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이끌던 김실광은 경찰 주재소로 들어가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였다. 경찰 주재소 주임 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고 하자 김실광이 시위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부수고 순사 부장을 넘어뜨린 후 일본 수사 2명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경찰복을 찢어 버리고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탈취하여 파기하였다.
이후 김실광과 시위 군중은 공립 보통학교까지 시위 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와 우편소, 면사무소로 시위 행진하면서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 때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고 영덕 경찰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황급히 도착하여 시위를 제지하려 하자 그들은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어 버린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수본(水本) 여관에 감금하였다.
이곳의 시위는 이튿날까지 지속되었는데, 다음 날 오전 11시경 포항 일본 헌병대에서 헌병 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도착하여 시위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이들도 엄청난 시위 군중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이날 오후 5시경, 대구의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도착하여 헌병들과 함께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시위 군중은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김실광은 체포되었고, 이 해 9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