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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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金氏三孝二女閭記 |
영어의미역 | Record of Three Filial Sons and Two Daughters of the Andong Kim Famil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교2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호민 |
성격 | 정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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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연도/발표연도 | 1807년 |
주요 등장인물 | 김몽상|김석진|김석진 처|김구 |
[정의]
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 김몽상의 처 강릉김씨, 김석진(金錫晋), 김석진 처 강릉최씨, 김구(金坵) 등 삼세삼효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 행적을 기록한 정려 기문.
[개설]
「안동김씨 삼효이녀려기(安東金氏三孝二女閭記)」는 강릉시 교2동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각(三世三孝二烈之閣)" 안에 있다. 제목은 '효열각 행적기(孝烈閣行蹟記)'이다. 이 효열각 행적기는 1807년(순조 7)에 작성되었다. 현판으로 재질은 나무이고 크기는 가로 84㎝, 세로 41㎝이다.
[창작경위]
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 김몽상의 처 강릉김씨, 김석진(金錫晋), 김석진 처 강릉최씨, 김구(金坵) 등 삼세삼효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 행적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내용]
삼세 삼효 이열의 효행과 열행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
김몽상은 자는 암유(巖臾)이며 호는 괴헌(槐軒)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개국 공신인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11세 후손이다. 증조는 김성철(金聲徹)이며, 아버지는 김필영(金弼榮)이다. 김몽상은 어려서 행실이 독실하였는데, 예닐곱 살 되던 해에 부모가 질병이 들자 밤과 낮으로 슬피 울며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간호를 하다가 부모의 병세가 호전되어 진지를 들게 된 뒤에 비로소 자신도 음식을 먹었다. 또한 부모가 병환 중에 붕어회를 드시고 싶어 하자 추운 겨울에 대문 앞의 연못에 나아가 얼음을 두드리며 슬피 호소하자 얼음이 갑자기 스스로 깨지면서 한 마리의 붕어가 나오니 그것을 가져다가 드렸다. 그 다음 해에는 또한 생고사리 나물을 드시고 싶어 하자 눈 덮인 산속에 아직 초목의 싹이 나지 않았을 때이지만 공이 산에 올라 이리저리 헤매며 정성을 다해 구해서 드리니 병환이 나았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자 지극히 예를 다하여 모시니,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정려를 내렸다.
김석진은 자는 진보(進普)이며 호는 취은(醉隱)이니, 김몽상의 큰 아들이다. 공은 가정의 교훈은 잘 익혀서 행동거지가 반듯하였고 어버이를 잘 섬겼다. 여름에는 시원한 자리를 보아드리고 겨울에는 따뜻한 옷을 마련하였으며, 좋은 음식을 구해 봉양하니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상례의 법제를 따라 모시고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슬퍼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상심하여 병환이 나서 20여 년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스스로 의학과 약재의 연구에 전념하고, 옷과 띠를 풀지 않고 밤과 낮으로 노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노력한 날이 헛되지 않았으나, 결국은 병환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면서 극진히 상례를 모셨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김구는 자는 경니(景尼)이며 호는 성재(省齋)이니, 김석진의 큰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후덕하였으며, 효행으로 마을에 널리 알려졌다. 어려서 어머니 상을 당하고 스물이 넘어서 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극진히 상례를 행하였다. 부모상을 당한 것은 천지간에 큰 죄를 지은 것이라 하여 쌀밥과 비단옷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미죽을 먹고 소금과 나물로 지내며 6년간이나 호곡을 하면서 상복을 입고 예를 행하였다. 이후로는 집안에서 수양을 하면서 예법을 준수하고 마을을 교화하니, 이일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김몽상의 처 김씨는 첨추(僉樞) 김시성(金始聲)의 딸이다. 너면서부터 천성이 유순하였고, 용모가 단정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부모 섬기는 일을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시집을 가면서는 몸가짐을 삼가며 규중의 법도를 따르고 부덕(婦德)을 잘 지켰다. 그의 정렬(貞烈)한 행실이 인근 마을에까지 떨쳤다. 남편이 병이 들어 위급하자 김씨는 목욕을 깨끗이 하고 손톱을 단정히 한 뒤 7일 낮과 밤을 울면서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또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넣어주니 남편의 호흡이 다시 통하여 다행히 병에서 회생하였다. 후에 남편이 죽자 극진히 상례를 다하여 모시고,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미죽으로 20여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냈다. 빗질과 얼굴을 꾸미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짚신과 거친 옷을 입고 지내고 스스로 미망인(未亡人)임을 자처하여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김석진의 처 최씨는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후덕하였으며 어려서 일찍 고아가 되어 극진히 그 상례를 모셨고 제사는 정성을 다하여 지냈다. 일가친척이 모두 최씨를 현숙한 규수라고 칭찬하여 김석진의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최씨는 남편이 병환이 들자 탁상을 세우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절하면서 자신이 그 병환을 대신 할 수 있도록 빌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남편의 입데 넣어 주었다. 그러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해주길 하늘이 너의 정성에 감동하여 특별히 네 남편의 목숨을 몇 달 연장해 주겠다고 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결국은 남편이 죽었으니 하늘의 감동이 헛되지 않은 일이다. 이 일이 아려져 정려를 받았다.
[특징]
강릉에 세거하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세 효자와 두 명의 열녀에 관한 행적과 정려를 받을 일에 대해 기록한 글이다. 조선 후기의 사회 속에서 효자와 열녀가 한 가문에 다섯 명이나 정려를 받은 경우는 매우 특별한 일이다. 모두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윤리 규범을 실천한 전형적인 삶의 표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