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63
한자 大芚寺-茶-草衣茶-傳承脈絡
영어공식명칭 Chatttok of Daedunsa Temple, Transmission Context of Chouich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서경

[정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펼쳐진 차를 중심으로 한 초의, 추사, 소치 등의 교유.

[개설]

조선 중기 이래로 일부의 선승(禪僧)과 문인들에 의해 겨우 계승되고 있던 음다풍은 19세기에 이르러 해남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성행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차는 호남을 중심으로 융성하였다. 호남은 다승(茶僧)인 초의(草衣) 의순(意恂)[1786~1866]의 생(生)[무안군 삼향면]과 사(死)[해남군 삼산면]를 함께한 곳이자, 차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유배와 18년 동안의 차생활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해남을 차의 정신 다향이라 부르는 이유다. 외가가 해남이었던 다산이 「걸명시(乞茗詩)」와 「걸명소(乞茗疏)」를 지어 보내며 차를 청하였던 아암(兒庵) 혜장(惠藏)[1772~1811]도 강진에 있는 백련사에 기거하던 학승이었다. 혜장은 대둔사[대흥사]의 승려로서 초의와 인연이 깊은 다승이었다. 대둔사의 다맥(茶脈) 속에서 청허(淸虛) 휴정(休靜)[1520~1604]부터 조선 후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차 보급에 앞장 선 응송(應松) 박영희(朴暎熙)[1892~1990]에 이르기까지 해남은 우리 차 문화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왔다.

[우리 차의 정신, 해남 그리고 초의선사가 주석한 일지암]

초의선사는 무안 왕산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서 승려가 되어 금담(金潭)에게서 선(禪)을 닦고, 윤우(倫佑)의 법을 이어받았다. 신위(申緯)·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면서 해남의 두륜산(頭輪山)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을 닦았다.

초의선사가 40년간 지관한 일지암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이 남긴 『소치실록(小癡實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소치는 『소치실록』에서 초의선사와의 꿈같은 인연을 회고하면서 당시 일지암의 구조에서부터 분위기, 그리고 주변 풍경을 기록하였다. 이는 초의선사를 둘러싼 조선 후기 사대부가와 승려들이 인연이 시작된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치가 1835년 초의선사와 첫 대면한 상황을 기록한 글을 살펴본다. “을미년[1835]에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으로 들어가 초의를 방문하였다. 스님은 정성스레 나를 대접하고 침상을 내주며 머물러 묵게 하였다. 몇 해를 왕래하매 기미(氣味)가 서로 같아,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였다. 소나무가 빽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몇 칸 초가집을 얽어 두었다. 버들은 드리워 처마에 하늘대고 가녀린 꽃들이 섬돌에 가득하여 서로 어우러져 가려 비추었다. 뜰 가운데 아래위로 못을 파고,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차(茶) 절구통을 놓아두었다. 스스로 지은 시에,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대통 이어 구름 샘을 저 멀리서 끌어왔네[鑿沼明涵空界月, 連竿遙取濕雲泉]’라 하였고, 또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석양 하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礙眼花枝剗却了, 好山仍在夕陽天]’라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일지암의 배경과 위치를 유추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1979년 말 일지암은 복원되었다. 더욱이 해남의 일지암은 차가 나는 산지라는 혜택을 받았다. 철철이 차를 만들고, 차밭의 동정을 살피고, 싹에서부터 차 꽃이 필 때까지의 일정은 그저 선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지암의 복원은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성 초의선사의 정신을 기르는 데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초의선사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선사로서 선의 법맥과 차의 다맥을 이어 갔다. 시(詩)·서(書)·화(畵)·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렸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불화나 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선사가 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련을 길러 내기도 했다.

또한 초의선사는 ‘한국의 다승’으로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했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직접 차를 기르고 좋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힘써 그 지역을 차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비롯하여 수많은 다시(茶詩)를 지어 다도의 이론적 확립을 모색하였다. 초의의 선 사상 역시 다선삼매(茶禪三昧)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으니, 초의에게 있어 차는 “불가의 오랜 음다풍(飮茶風)을 넘어서서 예술과 선 수행의 경지로까지 승화하였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초의선사는 뛰어난 시승(詩僧)이기도 했다. 초의선사의 시는 ‘맑고 심오하고 소순기를 벗었으며 담백하면서도 높은 뜻과 격조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초의선사는 두릉시사(杜陵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두릉시사의 구성원은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진재(眞齋) 박종림(朴鍾林), 광산(匡山) 박종유(朴鍾儒) 등이었다. 당대의 거물들과 평생을 지속한 우정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었다. 이외에도 『초의시고』에는 연사(蓮社), 청량사(淸凉寺) 등 많은 모임명이 나오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문사들의 수를 세어 보면 전체적으로 37명에 달한다. 40여 년을 국토의 최남단 해남 땅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주석한 것에 비해 많은 인물들과의 잦은 만남이라 여겨진다. 이 역시 초의선사의 인품과 빼어난 문학적 재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소치 허련, 다산 정약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 조선 후기의 굵직한 차인들과 인연이 되어 교유하면서 차와 그림을 매개로 문화와 예술을 나누었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권돈인(權敦仁), 신관호(申觀浩), 정원용(鄭元容), 정학연(丁學淵), 정학유(丁學游), 민영익(閔泳翊)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초의선사대흥사에서, 아암 혜장은 백련사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 소치는 대흥사초의를 찾아가 인연을 맺게 되고 소치를 추사 김정희에게 소개하여 글을 배우게 하였다. 소치는 녹우당을 출입하면서 초의에 대한 소문을 접한다. 5차례에 걸쳐 방문을 시도하여 마침내 소치의 나이 27세에 이르러 초의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헌종 1) 때부터 두륜산방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집안에 소장된 화첩을 접하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화업(畵業)을 시작하고, 31세에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하게 된다. 허련은 초의의 소개로 헌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당대 “예원의 종장(宗匠)”이라 불리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가장 인정을 받은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소치의 교유는 위에서 거론된 초의선사가 교유한 명사와 김정희 문하의 중인여항문인화가(中人閭巷文人畵家)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것이었다. 더욱이 향촌의 잡사에서 서울의 상층 문화계, 심지어 궐내의 정황까지 엿볼 수 있게 하는 방대한 기록을 남긴 경우는 다른 화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초의선사의 역할이 컸다. 소치는 『소치실록』을 남겨 해남의 일지암과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게 된다. 초의선사가 40년간 지관한 일지암의 유일한 기록이다.

『소치실록』에서 소치의 느낌대로 일지암은 그 자리에 수행하듯 앉아 있다.

소치가 초의를 찾아 오르고 180년 동안 초의와 다향으로 맺은 인연들이 또 초의와 교류한 숱한 차꾼들이 일지암을 찾았을 것이다. 선사가 41세 때 일지암을 결암하고 스스로 만족했던 노래가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연기도 안개처럼 가로눕는 이곳에 오랜 인연 있어/ 병발(甁鉢)의 어설픈 세간살이, 서까래 몇 개로 떠받쳤네/ 돌 털고 흙 파낸 곳에 물 고여 하늘 생기고 달 잠기니/ 속 빈 나무 길게 이어 백운천을 끌었네/ 이제, 향보에 새로 올릴 영약(靈藥) 찾으면서/ 때로 원기(圓機)[敎法]에 연하고/ 묘련(妙蓮)[부처님 설교]도 펴려 하네/ 눈앞 가리는 꽃가지들 조심조심 자르니/ 모습 드러내는 산봉우리들, 저녁노을에 아름답네”

[차와 그림을 매개로 맺은 인연, 차의 교유]

초의선사는 소치 등 조선 후기의 굵직한 차인들과 인연이 되어 교유하면서 차와 그림을 매개로 문화와 예술을 나누었다. 초의는 승려였으나 그 학식과 인품으로 인해 사대부들과 내로라하는 명사들, 김정희 문하의 중인여항문인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류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이나 기록에서 사라질 뻔 했던 차는 19세기 초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중흥하게 된다. 초의의 교유관계를 중심으로 그 중흥의 역사가 싹이 트는 계기가 되는데, 다산이 차 맛에 반하게 된 것은 유배생활 초기에 고성사의 스님으로부터 우전차를 얻어 마신 다음부터이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해남윤씨 집안의 도움으로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아암 혜장을 만나게 된다.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역을 배우며 차와 선을 논하면서 승·속(僧·俗)을 떠난 인간적 교유를 시작하였다. 혜장은 나중에 자신의 제자 초의를 다산에게 인도하여 가르침을 받게 하는데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과 백련사에서 아암 혜장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첫 대면을 한 후 정신적 사제 관계를 맺는다.

다산과 초의는 대둔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며 차와 시, 그림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1818년 8월 다산이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떠난(9월 14일) 후에는 초의추사, 소치의 인연이 이어진다. 초의추사는 동년배로 다산의 장남 학연 등과의 인연으로 한양을 왕래하던 초의는 1815년 추사와 처음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시고 있을 겨울에 만난 이래 차와 편지, 시와 글씨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이런 우정을 바탕으로 1839년(8월), 32살 진도 출신의 신진 화가인 소치를 발굴하여 추사 문하로 들여보낸 것도 초의였다.

소치는 초의와의 만남에 대해 『소치실록』에서 “소시 적에 내가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하고 담적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는가.”라고 밝히고 있다. 추사에서 소치로 연결된 예(藝)의 인맥은 소치의 후손들인 미산 허형, 남농 허건 등으로 이어져 호남 화단 인맥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으며,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차맥에 이어 운림의 차 정신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록은 허련의 교유관계를 살피는 데는 물론 향촌의 잡사에서 서울의 상층 문화계, 심지어 궐내의 정황까지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등 당시의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소중한 자료가 되어 그 중요성이 배가된다. 화가 소치를 통해 본 조선 말기의 서화계와 문화계의 양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초의선사와 소치에 대한 연구는 19세기 조선 문화계의 정황과 당시의 서화 제작 행태의 단면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작업인 것이다.

소치는 녹우당 그림들을 살피며 모사하면서 가진 재주가 빛을 발한다. 원말 사대가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1269~1354]과 예찬(倪瓚)[1301~1374]의 화풍을 토대로 한 독자적인 남종화풍을 구사하였으며, 조선 말기 화단에 남종화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추사가 소치의 예술 세계를 이룩해 준 스승이라면 초의는 화엄의 길을 잡아 주고 인생의 눈을 트여 준 스승이었다. 얽매지 않는 꾸밈없고 담백한 인생을 구사하였던 것은 초의의 영향이 지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의는 다수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었으며 저서도 많이 있으나 「동다송」을 저술하고 「다신전」을 등초하여 세간에 알렸다. 초의가 53세 되던 1838년 봄 서울을 거쳐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글에도 유려하지는 않지만 ‘다선일여’를 지향하는 깨끗하고 맑은 흐름과 정성이 배어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은 추사가 신관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추사초의에게 보낸 차시(茶詩)에서 그들의 교유를 살펴본다. 초의일지암에 틀어박혀 좀체 서울 걸음을 하지 않자 심술이 나서 보낸 글인 듯하다. “여보, 스님! 서울 한번 다녀가소.” 자꾸 편지를 해도 초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에 “저자 거리가 산속에 숨어 지내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니, 스님 도력이 아직 여만여만 한가 보우.” 하며 퉁을 준 것이다. 다음의 시 또한 초의에게 보낸 걸명시다.

“아침에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르고, 저녁에도 한 사람에게 곤욕을 치렀다. 마치 학질을 앓고 난 것 같다. 장난삼아 초의 상인에게 주다[朝爲一人所困嬲, 暮爲一人所困嬲. 如經瘧然, 戱贈草衣上人]/ 하루 걸러 앓느라 학질로 괴로우니[鬼瘧猶爲隔日難]/ 아침엔 더웠다가 저녁 땐 오한 드네[朝經暮又熱交寒]/ 산 스님 아무래도 의왕(醫王) 솜씨 아끼는 듯[山僧似惜醫王手]/ 관음보살 구고단(救苦丹)을 빌려주니 않누나[不借觀音救苦丹]”

학질을 앓아 하루에도 몇 차례나 오한이 들고 난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와 글씨를 써 달라고 조른다.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럴 때 더운 차라도 한 잔 마시면 오한이 말끔히 가실 것만 같다. 하지만 초의는 좀체 의왕의 손길을 건네 관음보살의 구고단(救苦丹)을 보내 줄 모른다고 푸념하였다. 차를 구고단, 즉 고통에서 건져줄 단약이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또한 차에 대한 답례로 추사는 계절 부채나 글씨를 보내곤 하였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걸작 「명선(茗禪)」은 초의의 구고단을 받고서 답례로 보낸 글씨다.

추사가 제주도 대정(大靜)에 유배되었을 때 세 번이나 찾아가 모셨고, 70세 때에는 추사의 글씨를 판각하는 등 스승을 기리는 노력을 한다. 권돈인, 정학연, 신관호 등 명사들과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 가며 교유한다. 이들과는 노경에 들어서도 계속적으로 교유를 이어 가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명사들에 대한 허련의 대인관계나 처세는 매우 원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추사는 시(詩)·서(書)·화(畵)·다(茶)에 능하여 예술가이면서 학자이면서 또한 다인이기도 하다.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더 머무를 수 없었던 이유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소치는 유배 중인 스승을 찾아뵙기 위하여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바닷길인 제주도에 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린 소치의 「완당선생해천일립도(阮堂先生海天一笠圖)」에는 추사의 제주도 유배 시기[1840~1848]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김정희의 자세는 허둥대기보다는 자애롭고도 느긋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고, 그 표정 역시 유배생활의 고통이 드러나기보다는 담담하고 초연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정미년 10월 18일 집을 떠남. 22일 배를 타고 소완도에 이르러 바람을 기다림. 24일 이른 새벽 배를 타고 나가 같은 날 저녁 어둑한 무렵에 별도포(別刀浦)에 도착, 하루를 묵음. 26일 제주에 들어감. 11월 1일 명월진(明月鎭)길을 경유 대정에 옴. 10일 서울로 보낼 편지를 마름질함. 10일 제주로 들어감. 11일 포(浦)로 내려감. 4월 11일 배를 출발. 13일 이진(梨津)에 도착한 뒤 17일 뱃길을 경유 집으로 돌아옴.”

이 모습이 제주도의 구체적이고 외형적인 일상의 단면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유배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고고한 인품과 정신세계를 표현한 다분히 상징적인 그림임을 이해할 수 있다.

소치는 스승 추사를 따라 예산으로 내려갔다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자 강경포(江景浦)에서 배를 타고 진도로 귀향하였다. 추사가 귀양 간 다음해인 1841년 2월, 소치는 일지암을 방문하여 초의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한다. 이에 초의가 서신을 써 주었고 소치는 서신과 함께 차를 가지고 제주도로 추사를 찾아갔다. 제주도에서 초의의 서신과 차를 받아 본 추사는 감회에 젖어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글을 써 소치편에 초의에게 보냈다. 추사초의에게 써 준 다실 현판은 지금도 대둔사 동국선원에 걸려 있다. 이후 추사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란 현판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이란 경문도 써 보내 주었다. 초의 선사와는 동년배 지기로 우의가 두터웠다. 초의 선사가 법제한 차 맛이 그리워 ‘차를 비는 걸명(乞茶)’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수년 이래 햇차는 과천의 나의 집과 한강 정약용의 별저 밑에 맨 먼저 이르렀거늘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이 있네. 두륜산의 중은 형체와 그림자도 없어졌단 말인가. 어느 겨를에 햇차를 천리마의 꼬리에 달아서 다다르게 할 것인가…. 만약 그대의 게으름 탓이라면 마조(馬祖)의 갈(喝)과 덕산(德山)의 몽둥이로 그 버릇을 응징하여 그 근원을 징계할 터이니 깊이깊이 삼가게나. 나는 오월에 거듭 애석히 바란다네.”

위와 같이 해학이 넘치는 글을 보내어 차를 청하기도 하였으며, 언젠가 초의추사에게 차를 보내면서 다른 친구 백파(白坡)에게도 전해 줄 것을 부탁하자 좋은 차에 욕심이 난 추사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나누어 주신 차를 백파에게 주기가 아깝습니다. 큰 싹과 고아한 향기며 맛이 너무도 뛰어납니다. 한 포만 더 보내 줄 수는 없는지요?”

“차에 대한 일을 이미 쌍계사에 부탁하고 또 동지 전에 일찍 딴 광양 해의로써 관화와 언약하여 신반에 미치도록 부치라고 하였는데 모두 구복 간의 일이라 붓을 놓고 한번 웃다[茶事已訂雙溪 又以光陽至前早採海衣 約與貫華 使之趁辛槃寄到 皆口腹間事 放筆一笑]/ 쌍계사 봄빛이라 차 인연은 오래라네[雙溪春色茗緣長]/ 육조(六祖)의 탑광 아래 제일의 두강이여[第一頭綱古塔光]/ 늙은이 탐이 많아 이것저것 토색하여[處處老饕饕不禁]/ 향기로운 해태를 신반에 또 언약했네[辛盤又約海苔香]/ 옛 샘을 길어서 차를 시험하네[汲古泉試茶]/ 모진 용의 턱밑에 맑은 구슬 박혔는데[獰龍頷下嵌明珠]/ 솔바람과 산골 물 그림을 집어 가졌네[拈取松風磵水圖]/ 성 안팎의 샘물 맛 시험 삼아 가려 보니[泉味試分城內外]/ 제주에서도 차를 품평할 수 있으리라[乙那亦得品茶無]”

이처럼 소치는 초의추사 사이에서 차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추사는 초의에게 소치의 그림을 보내며 청정한 공양이 되라는 안부를 묻기도 한다. 차 문화를 즐긴 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차를 매개로 한 교유 안에서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벼슬하지 않는 서민은 임금이 있는 왕궁에 출입할 수 없었다. 1846년에는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린 그림을 헌종에게 바쳤고,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예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재에서 헌종을 알현할 수 있었다. 또,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42세에 헌종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헌종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헌종이 친히 그림책을 소치에게 보여 주면서 그림에 대해 묻기도 하고, 소치가 그림 그릴 때 직접 화폭을 잡아 주는가 하면, 제주도에 추사를 만나러 세 번 갔다 올 때 바다의 파도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느냐, 무엇을 하면 날을 보내고 있는지, 제주도의 풍토와 민물(民物)이 어떠한지, 추사의 귀양살이가 어떠한지, 호남에 초의승이 있다는데 지행이 어떠한지, 어떤 인물이냐 등등의 문답이 있었다. 초의가 우리나라 화단에 끼친 공적은 적지 않다. 흔히 초의를 시·서·화·차의 사절이라 하거니와 대둔사의 단청과 탱화, 「관음도」 등에 그 족적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와 근대를 잇는 호남의 다맥(茶脈)]

조선 후기 왕권이 약화되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전통적 성리학에 반기를 드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학문적 경향을 가진 지식인들은 승려들과 교유를 통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다. 승려들 역시 사원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자 새로운 사상과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사찰의 승려들과 문사들 사이에서의 교유로 이어져 차(茶)는 승려들의 수행이나 청빈한 문사들의 마음을 전하는 하나의 매개물이 된다. 이처럼 한국의 차 문화는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영초를 피우듯 조선의 침체기를 거치면서 차와 선의 경지가 하나라는 다례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이처럼 열악한 우리의 차를 중흥시킨 인물은 한국의 다성이라 불리는 초의선사이다.

초의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내려온 호남의 차맥은 근대의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진다. 의재는 소치와 미산의 운림산방으로부터 학문과 그림을 계승한 법손이다. 의재는 전통적인 남종화의 문기(文氣) 어린 화풍을 고수한 인물이다. 의재는 무등산 마루턱에 춘설헌(春雪軒)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시·서·화 삼절에 모두 능한 전통적인 문사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진로를 걱정하는 지사(志士)이기도 하였다. 의재 허백련은 반평생을 다원과 제다공장을 경영하였으며 다도생활을 통한 건강 유지와 정신 집중으로 한국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또 생활다도 보급에도 앞장섰고 다도문화와 차 산업 연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며 차를 널리 보급한 실천주의 차인이다.

의재의 차 정신은 마시는 사람의 정도에 따라 자유롭게 마시도록 격식에 속박됨이 없이 자유로이 물마시듯이 마실 것을 생활차로 권유하였으나 차를 공부하는 다인들에게는 철저하게 수신다례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차 사상은 자유롭되 예를 잃지 않는 차 생활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차를 실용화하고 생활화하는 지침서가 되었다. 소치가 얽매지 않는, 꾸밈 없고 담백한 인생을 구사하였던 것은 초의추사의 영향이 지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의 차 생활에서 배운 차 정신은 예술세계의 혼이 되어 작품으로 탄생하였다. 승려들과 문사들 사이에서의 교유로 이어지는 차는 승려들의 수행이나 청빈한 문사들의 마음을 전하는 하나의 매개물이었다.

의재 허백련이 차밭을 일구고 호남의 차 문화를 뿌리내리게 했던 원동력은 예술작업이었다. 차를 만들고 보급하는 데 들어가는 인건비나 제다경비는 그림을 팔아 메웠으며 차철이면 의재는 차를 메고 서울에 가 장관·차관이나 국영업체장들을 찾아다니며 차와 그림을 그냥 주며 차를 마시자고 권하고 다녔다. 광복 이후 의재가 보급해 온 춘설차는 그러한 전통 차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첨찰산 운림산방에서 무등산 춘설헌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온 정신의 맥(脈)임에 틀림없다. 이런 맥은 호남의 차맥을 다지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소치는 조선조 마지막 다인(茶人)이었으나 그 맥은 지금도 남화의 흐름 속에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우리 문화의 여러 유형에는 아주 오랜 과거부터 계승되어 오는 전승문화도 있고, 조선 말기나 일제강점기 또는 해방 당시의 단절된 문화도 있으며 새로 형성된 문화가 있는가 하면 현재 단절 직전에 있는 문화도 있을 것이다. 문화는 생활을 바탕으로 한 지역의 삶을 조명하는 역사이고 민중의 색깔이며 감정의 향취이다. 또한 갈등 체험으로 축적된 사회집단의 정신적인 표상으로 유형·무형의 사회조직, 예술, 도덕, 기술, 도구, 언어, 신앙과 사고양식 등 학습된 행위를 통칭하는 것으로 지역성과 역사성을 갖는 풍토적 문화 영역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차 문화는 쇠퇴의 길을 걸어 차 문화의 단절이라는 위기에서 중요한 교유가 자리한다.

차가 호남이라는 무대에서 많은 문사들의 교유를 통해 예술과 문화의 맥을 잇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소치의 교유를 통해 파악해 보았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던 조선왕조의 양반정치체제가 무너지고 서구열강의 위협이라는 대외문제에도 직면하는 등 만성적인 내우외환의 시기에 소치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다성이라고 하는 초의선사가 가장 먼저 다산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그 인연의 맥은 예술과 문화를 잇게 되었으며, 그 문화를 이어 주는 매개체는 차였다. 다산, 혜장, 초의, 추사, 소치의 예의 인맥은 미산, 남농, 의재로 이어지면서 정신적 사제 관계와 우정 관계를 순환하였다. 차와 그림으로 인연을 맺고 해남을 중심으로 대둔사와 다산초당, 녹우당은 차와 편지, 시와 글씨를 주고받으며 예술과 문화가 오가는 공간적 무대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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