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53
한자 李舜臣-抗日運動-聖地梨津-
영어공식명칭 Ijin Village, Saving Yi Sun-shin, and a Sacred Place of anti-Japanese movement,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성환

[정의]

이순신과 항일운동의 역사가 담긴 해남군의 전통 마을인 이진마을 이야기.

[개설]

이진마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속하는 해안가 포구 마을이다. 바닷길의 중요한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고대부터 해상교류의 거점으로 활발하게 이용되었고, 포구가 있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남(海南)이라는 지역명과 가장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포구 마을로서,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오가는 포구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하여 수군만호가 운영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었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이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09년에는 대한제국기 호남의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최대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가 시작되었다. 이진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수군진과 이순신이 나라는 지킨 장소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현재 이진마을 내에는 이진성과 수군만호 기념비, 수군이 사용한 우물 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마을의 상징인 이진성(梨津城)이 복원되어 있다.

[이진마을의 입지 조건과 자연환경]

이진마을은 해남군의 가장 남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 완도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완도대교를 통해 완도와 바로 연결되는 위치이다. 마을의 서쪽에 달마산(達磨山)[470m]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북쪽으로 두륜산이 보인다. 내륙을 중심으로 보면 이진마을의 위치는 거의 땅끝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제주도와 내륙을 연결하는 포구로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지리서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약 373㎞]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에 지금 마을 곳곳에 제주도에서 건너온 현무암의 흔적이 쉽게 발견된다. 현재 이진마을 대부분의 집들은 마을 사람들이 “송뜰”이라 부르는 소나무 산 아래 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포구마을의 형태를 띠고 있고, 도로명 땅끝해안로의 건너 내륙 쪽에도 일부 집들이 흩어져 있다. 해안가는 거주 공간으로 사용되고, 내륙 쪽 공간은 농사를 짓는 땅으로 주로 활용되어 왔다. 현재도 그러한 공간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마을의 상징 이진성(梨津城)]

해남군 북평면에 속하는 이진마을의 상징은 조선시대에 왜적으로부터 우리의 바다를 지켰던 수군진인 이진성(梨津城)이다. 수군진이 설치된 것은 조선 명종 때 발생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의 영향이 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2년 전인 1555년(명종 10) 왜적들이 해남군 북평면 남창으로 들어와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하자 해안 방어 능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생겼다. 공식적으로는 정유재란 이후인 1598년(선조 31)에 수군진이 설치되었으며, 1627년에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다. 해안가에 돌로 쌓은 형태인 성벽도 이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은 남북이 높고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도 이진마을에는 이진성(梨津城)의 흔적들이 잘 남아 있다. 이진성에 대해서는 각종 사료에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군 남쪽 120리[약 47.13㎞]에 있고 성은 석축이다. 둘레는 1,470척, 높이 8자이며, 치첩 334개소, 샘 2개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병력에 대해서는 『해남읍지(海南邑誌)』에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과 대변군관 12명, 진리 18명, 사령 6명, 군뢰 2명, 방군 271명이 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곽의 흔적은 이진성지(梨津城址)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20호로 1988년 12월 21일에 지정되었다.

이진성과 관련하여 현재 마을에는 당시 책임자였던 만호의 공적을 기념하는 세운 4기의 영세불망비와 마을 주민들이 장군샘이라고 부르는 우물이 남아 있다. 만호비는 마을회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진성의 서문 입구에 있던 것을 방문객들의 눈에 잘 띄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가장 빠른 시기인 1848년에 세워진 박경환의 비와 1851년에 세워진 최상규의 비, 1861년에 김관길의 비 2기가 나란히 서있다. 마을의 중앙 평지에 남아 있는 장군샘은 그 형태와 규모로 보아 수군진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우물 내부는 원형의 석축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지상부는 석재를 이용한 정사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장군샘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우물의 규모가 매우 크고, 공들어서 만든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지상에 노출된 사각형 우물 석축의 규모는 가로 187㎝, 세로 176㎝이며, 오른 쪽 우측 돌기둥의 측면에 우물이 도광(道光) 19년[1839] 기해(己亥)년에 중수되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마을 주민들은 장군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물 위에 정자를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이진마을 사람들 이순신을 살리다]

이진마을은 호국의 영웅 이순신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때는 1597년 8월 2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군사의 출입이 비교적 원활한 포구를 찾아 나선 후 강진 마량 앞바다를 거쳐 도착한 곳이 해남 이진이었다. 이곳은 완도 해역과 연결되는 해로의 요충지였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의 건강에 큰 위기가 왔다. 잦은 군사훈련으로 심신이 지쳐 있어서였는지, 머리가 심하게 아프고 구역질까지 하며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난중일기』에는 토사곽란이 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세가 무척 심각해지자 8월 23일 이순신은 배에서 내려 이진마을에 들어섰다. 이진마을에 내린 이순신은 마을 주민들의 극진한 도움을 받으며 치료를 받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도 이진마을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오고 있다. 주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몸에 좋다는 것을 가져와 이순신을 봉양하였다. 비록 이진에 머문 시기는 3일에 불과하였지만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하면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에서 이진 마을과의 인연은 매우 소중하였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승리를 위한 전략을 고민하던 이순신에게 큰 힘이 되었던 해안가 포구 마을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는 이러한 내용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호남의병활동의 마지막 중심지]

해남 북평면 이진마을은 대한제국 말기 의병활동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1905년 단발령에 이어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 호남의병이 있었고, 북평면 이진마을은 의병활동의 중심지였다. 1909년 9월부터 일본은 호남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라 칭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여파로 호남의병활동의 근거지는 전라남도 남해안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고, 마지막에는 해남 두륜산 일대가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9년 두륜산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활동은 각기 독립적인 부대를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해남 북평 이진 출신인 황두일도 120여 명에 이르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황두일 의병장의 활동으로 북평 이진마을을 비롯한 북평면은 의병활동의 중심 마을이 된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황두일은 결국 일본의 토벌 작전으로 체포되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었던 호남의병을 제압한 일제는 1910년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을 발행하였는데,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는 당시 붙잡힌 의병장 16명의 단체사진이 ‘폭도거괴(暴徒巨魁)’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이 사진 속에 의병장 황두일도 포함되어 있어 최후까지 장렬하게 저항하였던 호남의병장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이 시작된 곳]

이진마을이 지닌 항일운동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활동으로 이어진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 단체였다. 1933년 5월 이진마을의 김홍배를 중심으로 농민운동을 대중적으로 지도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목적에 의해 처음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후 해남군과 완도, 장흥, 강진, 진도, 목포, 보성, 순천, 여수 등 전라남도 9개 군에 걸쳐 조직되었다. 해남에는 북평면산이면, 현산면에 각각 지부를 두고 있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단체였다. 활동이 노출된 후 9개 군에서 500명이 넘는 관련자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이 중 57명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었을 정도로 193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조직체가 워낙 치밀하여 발각된 후에도 관련자들을 검거하는 데만 6개월이 소모될 정도였다.

이러한 전남운동협의회가 북평 이진마을에서 시작된 배경에는 동광학원과 사회주의 운동가 김홍배가 있었다. 1927년에 이진마을에는 사설학원인 동광학원이 설치되었는데, 설립자인 강기동은 완도의 항일운동가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이진마을과 북평 지역 청년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독립사상을 교육하던 동광학원이 있어 청년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항일의식이 강하였고, 역사적으로 이진마을은 왜적을 막아 냈던 수군진이 있었던 곳이라는 역사의식도 한몫했다. 동광학원을 중심으로 항일의식을 배워 나갔던 이진마을에 1932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김홍배가 돌아오면서, 전남운동협의회가 태동하였다. 김홍배는 완도의 황동윤과 이기홍, 북평 오산오문현 등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운동체로 발전하여 갔다. 또한 전남운동협의회 활동과 관련하여 김암우, 문영주 등의 항일운동가가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그들은 어업조합, 소작쟁의 등을 주도하는 활동을 하였다.

[호국 사적지로 발전을 꿈꾸는 이진마을]

이진마을은 해안가에 형성된 전형적인 포구 마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200여 주민들의 경제활동 기반은 대부분 농업이다. 아직까지 마을에 관광객을 위한 상업시설이나 그 흔한 카페 같은 것도 들어서 있지 않지만 이순신과 관련된 호국사적지라는 점을 살려 역사 마을로의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마을의 상징인 이진성이 있다. 이진성의 성벽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인데, 역사와 이야기가 흐르는 이진성 순환탐방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진성의 성벽을 따라 이 길을 걷다 보면 정유재란 때 국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이순신의 기상이 살아 있는 역사적 현장임을 느낄 수 있다. 탐방로는 마을 안길 탐방로, 서쪽 성벽 탐방로, 남쪽 성벽 탐방로 세 코스가 있다. 서문지 위쪽 탐방로를 오르면 전망대가 있는데, 주변의 바다 환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주변을 살펴보면, 이진마을이 해안가 포구와 산성이 함께 공존하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산성 아래에 옹기종기 전통가옥들이 모여 있고 해안가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을 걷다 보면 그 편안함에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이진성 해안마을 쪽에는 세 개의 정자가 설치되어 있는데, 마을회관, 포구, 이진성의 남문지 앞에 고르게 자리하고 있어 주민들과 나그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마을에는 두개의 경로당이 있는데 마을사무소 역할을 겸하는 이진리노인당과 이진여성경로당이 구분되어 있다. 이진마을은 경로 효친 시범 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이곳이 조선시대 왜적으로 부터 우리의 바다를 지키던 수군진이 있던 곳이라는 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관련 유물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는데 특히 마을 주민들이 장군샘이라 부르는 수군진 관련 우물은 마을 주민들의 숨은 보물이다. 요즘은 조선시대 호국의 역사와 함께 잊힌 항일 역사에서도 이진마을이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 마지막 의병투쟁 장소였고, 1930년대 최대 항일운동 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가 이곳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있다. 이순신의 구국활동, 조선시대 수군진, 대한제국 항일의병,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역사를 이진마을 한곳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 마을 원로들에게만 전해 오던 이러한 이야기에 마을 주민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근자에는 마을 입구에 관련 내력비를 세웠다. 주민들은 인근 땅끝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전통 역사 마을인 이진마을도 함께 둘러볼 수 있도록 관련 탐방로를 정비하였고, 관광자원화를 위한 여러 방법을 고민하면서 마을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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