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98
한자 海南大興寺淸虛堂休靜大師碑
영어공식명칭 Haenam Daeheungsa Cheongheodang Hyujeongdaesabi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7년연표보기 -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778년 -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비신 재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20년 -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청허대사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04년 -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 청허대사 입적
현 소재지 대흥사 청허당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지도보기
성격 탑비
양식 귀부, 비신, 방형의 개석을 갖추고 있는 비
관련 인물 청허 휴정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380㎝[전체 높이]|235㎝[비신 높이]|59㎝[비신 가로]|60㎝[비신 두께]
소유자 대흥사
관리자 대흥사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 청허당에 승려 청허의 행적을 기록하여 건립한 비.

[개설]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海南大興寺淸虛堂休靜大師碑)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 청허당에 있는 비석이다. 승려 청허휴정(淸虛休靜)[서산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1647년 건립하였다. 청허대사는 1520년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태어나 1604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였다.

[건립 경위]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청허 휴정의 제자들이 장유(張維)에게 1631년 비문을 부탁하고, 1647년 청허 휴정의 승탑을 건립하면서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비신이 훼손되어 1778년 비신을 다시 제작하여 세웠다.

[위치]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는 구림리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산기슭 아래 부도전 안에 있다.

[형태]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의 전체 높이는 380㎝이며, 비신은 높이 235㎝, 가로 59㎝, 두께 60㎝이다. 귀부의 얼굴은 용두화되었고 동그란 두 눈은 튀어나왔다. 입은 여의주를 물지 않은 채 꼭 다물고 있다. 목은 짧고 굵으며, 앞쪽 양발은 안쪽으로 모아 조용히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고 주름이 많아 생동감을 잃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등 전체를 덮고 있으나 형식적이다. 등 가운데 비좌(碑座)를 설치하여 비신을 받게 하였다. 비신은 방형이고 개석(蓋石)은 방형의 지붕 위에 복발 형태를 조각한 후 보주를 얹은 특이한 형태이다.

[금석문]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 대사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남현 대흥사 청허 대사 비명 병서(海南縣大興寺淸虛大師碑銘 幷序), 홍문관 대제학 계곡 장유 찬(弘文館大提學谿谷張維 撰)하였다.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영골(靈骨)을 이제 이곳에 봉안하기는 하였다마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법을 얻으신 것으로 말하면 실로 남쪽 지방에서 비롯되었고 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야말로 스승께서 일찍이 주석(駐錫)하신 곳이니, 뭔가 글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해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서 쌍흘이 대표가 되어 나의 집을 찾아와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임제(臨濟)로부터 18대를 전해 내려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 이르는데 여조(麗朝)의 국사(國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실로 석옥의 법을 전수받았고, 이로부터 다시 6대를 전하여 우리 스승에게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중국에 전하여졌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60여 세 만에 우리 스승에게 부탁하여 맡기게 되었는데, 그 원류(源流)가 이처럼 심원하니 이런 내용으로 명(銘)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에 대해서는 내가 본디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렇게 주고받았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서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고 하자, 쌍흘이 다시 말하기를,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안팎으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인데, 예로부터 공문(空門)[불가(佛家)]의 기숙(耆宿)들 가운데에는 왕사(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께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성조(聖祖)[선조(宣祖)를 말함]의 지우(知遇)를 받고 임금의 글을 받는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한데 모은 뒤 명(明) 나라의 정토(征討) 사업에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스승의 마음으로 말하면 어찌 일찍이 작위적(作爲的)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겠는가.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으로, 공유(空有)에 처한 마음이 충의(忠義)의 일로 빛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점들을 빙자하여 굳이 청하게 된 것이다.” 하기에, 내가 훌륭한 말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응낙을 하고 행장을 펼쳐 보았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안주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아버지 최세창(崔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어머니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 가서 몇 마디 주문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 풍신(風神)이 빼어났으며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주목(州牧)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어졌다.

10세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두륜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두륜산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라고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중종 35)[1540]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도중 한낮에 우는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평생 바보같이 살아갈망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시를 짓기를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 사람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라 하였다.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화상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500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로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를 행하여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었으므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과 자휴(自休) 등이 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는 사리 몇 과(顆)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000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하였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통탈자재(通脫自在)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는 무리들이 계(戒)를 뛰어넘는 행동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총림(叢林)에 유행되고 있는데, 시게(詩偈)를 보면 상랑(爽郞)하면서 놀랄 만한 말들이 많고 필적(筆跡) 또한 소경(疏勁)하여 운치가 있다고 한다. 행장에 서술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이쯤 되면 또한 두루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아, 대사의 환신(幻身)은 이미 변화되어 티끌로 돌아갔지만 환(幻)이 아닌 그 무엇은 변화되어 사라진 적이 일찍이 없었으니, 한 조각 돌에 몇 장의 글을 새긴다 한들 대사를 불후(不朽)하게 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 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마 그 자취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려는 그 문도들의 마음씨야말로 진정 근실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세교(世敎)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마침내 명(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의 심인(心印) 조사가 전하였고 조사의 의발(衣鉢) 청허가 받들었네. 청허의 경지 본래면목(本來面目) 터득하여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연못 속의 물고기라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하였고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국난 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숨거나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모두 완벽하게 처리하였도다.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이겠는가.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곡두 아닌 당체(當體)는 원래가 여여(如如)한 법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신령스러운 이 구역 돌아다보니 실로 달음의 도량(道場)이라 할 만한데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숭정(崇禎) 4년 신미에 짓고, 16년 뒤인 정해에 세움.”

[西山淸虛大師 滅後三十有八年 法嗣葆眞 彦機 雙仡 海眼等 將樹石于妙香 楓岳 月沙李相公 爲銘之 旣而 又相與謀曰 吾師靈骨之藏 雖在是 乃其發迹得法 實自南方 而天冠諸庵 頭輪大興寺 又嘗休錫之地 不可以無識也 於是 海眼爲之狀 雙仡踵門而請余文其言曰 臨濟十八傳而爲石屋淸珙 麗朝國師太古普愚 得石屋之傳 自是 又六傳而至吾師 其源流之遠如此 請以是銘焉 余曰 而師之道 吾固未暇學也 授受之說 吾將何所徵而言之 仡又進曰 世出世法 外內不相及 自昔空門耆宿 鮮有致力王事者 吾師以窮衲子一言受知于聖朝 蒙宸翰之寵 及倭亂之作 卒能奮義聚衆 協助天討 克贊恢復之烈 名聞華夏 夫吾師之心 何嘗有所作也 隨緣應跡 功用卓然 心冥乎空有 而事光乎忠義 敢藉是以請 余曰善 遂諾而發其狀 師法名休靜 字玄應 淸虛堂 其號也 亦穪西山 俗姓崔氏其先完山 坐法徙安州 父世昌 箕子殿叅奉 母金氏 娠師有異夢 生三歲 忽有老叟來曰委訪小沙門耳 遂提兒呪數聲 摩其頂曰 宜名以雲鶴 言訖出門 不知所之 兒時嬉戱 必以佛事 稍長 風神穎秀 出語驚人 爲州牧所愛 稱以奇童 十歲喪怙恃 伶仃無所依 州牧携至京 就學於泮齋 屢試輒屈 鬱鬱不得意 遂南遊 入頭流 窮巖洞之勝 徧閱內典 忽有出世之志 辭訣同伴 有詩云 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遂投崇仁長老落髮 從一禪和尙受戒 時嘉靖庚子 師年二十一歲矣 尋參靈觀大師 印可後 因遊行村落 聞午鷄忽然有悟 歎曰 寧作一生痴獃漢 不欲作鉛槧阿師 拈筆題落葉曰 髮白心非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 自是 雲遊關東諸名山 偶入京師 赴禪科中選 陞至禪敎兩宗判事 無何 拂衣入楓岳 作三夢吟 一禪師 臨滅 留讖云 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 來自南溟 會師自某所至 爲禱舍利 靈應赫然 師雖藏蹤晦彩 而道譽益隆 虛憍我慢之徒 望風心醉 爭就北面己丑逆獄起 爲妖僧所誣 被逮對獄明暢 宣廟素聞其名 卽命釋之 引見 賜御製一絶 及御畵墨竹障子 師立進詩謝恩 上益稱賞 厚賚還山 壬辰之難 宣廟西幸 師出山 訪行在 上謁 上曰 國有大難 山人其能自安乎 師揮涕對 願效死 上嘉之 命授八道禪敎都摠攝 分命諸上足 糾聚義徒 於是 惟政起關東 處英起湖南 與權公慄合兵 鏖賊于幸州 師自率門徒千五百人 隨天兵 進克平壤 天朝經畧宋應昌 提督李如松 及三協總兵以下諸將佐聞師名 爭送帖致敬 或贈詩稱美 辭禮甚虔 京城旣復 上將旋軫 師率徒數百 扈駕還都 請於上曰 臣老且死 請以兵事 屬弟子惟政等 乞骸骨歸 上嘉其志 許之 賜號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 師旣歸妙香 翛然一閒道人耳 甲辰 正月 二十三日 將示寂于圓寂庵 是日 肩輿衝雪 徧訪近山諸庵 拜佛說法 還方丈 頮盥 具威儀 焚香佛前 取筆自題畵像曰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又寄書 訣惟政處英二門人訖 趺坐就化 世壽八十五 禪臘六十五 異香滿室 累日及歇 闍維日 得靈骨一片 舍利二粒 就普賢 安心寺 建窣堵波 惟政自休等 又奉頂骨一片來楓岳 得舍利數顆 窆于楡岾寺之北岡 師少從靈觀得法 而宗風之振 近代無比 弟子千餘人 知名者七十餘人 能領袖後學 爲一方宗主 不下四五人 可謂盛矣 晩節通脫自在皮相之流 或疑其越戒 識者 不以病焉 所著禪家龜鑑 禪敎釋 雲水壇 三家一指 各一卷淸虛堂集八卷 行於叢林 詩偈爽朗多警語 筆跡踈勁有致云 狀之所述如是 其亦備矣 噫師之幻身 旣已化爲灰塵矣 其非幻者 未嘗隨而變滅 一片之石 數紙之文 何足爲師不朽計 雖然 尊其道則不忍淺其迹 而欲永其傳于來世 比固其徒用心之勤 而亦世敎之所宜許也 莊周有言曰 莫足爲也而.]

[不可不爲 其是之謂歟 遂銘之 其詞曰/ 諸佛之心 祖師傳之 祖師之傳 淸虛延之/ 淸虛之學 得乎天全 一絲不罣 如魚在淵/半偈徹聞 黙契聖心 宸翰龍賚 光動叢林/ 遘難奮義 贊成中興 錫號國一 莫之與京/ 殺活自由 隱現無累 世出世間 兩盡能事/ 緣盡而逝 譬彼薪火 茫茫三界 誰渠誰我/幻化雖滅 非幻自如 名山石龕 永閟神珠/睠茲靈區 實維覺場 鑱珉紀蹟 昭示無疆/崇禎 四年 辛未 撰 : 後十六年 丁亥 立.]

[현황]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대흥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대흥사 부도전 안에 대흥사 13대종사, 대흥사 13대강사의 부도 및 비석과 함께 있다.

[의의와 평가]

해남 대흥사 청허당 휴정대사비는 1647년 처음 건립되었으나 비신이 훼손되어 1778년 비신 및 개석을 다시 조성하여 세웠다. 청허휴정대사비의 개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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