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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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 초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에 치소를 두었던 옛 해남 행정구역. 고려 태조 대에 통일신라 때의 침명현(浸溟縣)을 해남현(海南縣)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해남현의 치소는 현산면 고현리였다. 하지만 고려 말·조선 초 왜구의 침략으로 진도현과 통합·분리 혹은 치소의 이동을 거친 이후, 세종 대에 현재의 해남읍으로 치소가 확정되고 해남읍성도 축조하였다.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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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 금강산에 있던 조선시대 간선 봉수. 금강 봉수(錦江烽燧)는 1437년 해진군(海珍郡)에서 해남현이 진도군과 분리되어 현재의 해남읍으로 옮겨 와 설치된 간선 봉수[직봉 사이에 중간의 신호불통을 우려하여 직봉으로 전달되는 작은 갈래의 봉수]이다. 화산면 관두산 봉수와 해남현 관문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여 해남현에서 관두로 신호를 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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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해리에 있는 고려시대 건립된 산성. 금강산성(金剛山城)은 13세기 중반 진도 용장산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14세기 왜구 침입기를 거쳐 해남읍성이 축조되면서 1434년(세종 16)까지 안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으로서 기능을 유지하였으며, 이후 봉수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성은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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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법정리. 1949년에 일본식 지명을 바꾸면서 ‘대화정(大和町)’에서 ‘남동리(南洞里)’라 칭하게 되었다. 본래 『호구총수(戶口總數)』 기록에 의하면 현이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후에 군일면 지역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남문리의 남쪽 지역을 나누어 대화정이라 하여 해남군 해남면 대화정으로 개설되었다. 1949년 일본식 지명이 교체되는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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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법정리. 남외마을은 해남읍성의 남문 밖이었기에 남외라고 불리게 되었다. 본시 해남읍성의 남문 밖이므로 ‘남문밖→남밖에’·‘남문외(南門外)→남외(南外)’라 칭하였는데 ‘남외(南外)’로 굳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외리 일부와 군이면의 용정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남군 해남면 남외리로 개설하였다.1955년 해남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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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읍내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다리. 남천교는 남천에 세워져 남천교라 칭하게 되었다. 남천교는 해남읍성의 남문에서 나와 남천을 건너 동쪽에 있는 삼산면이나 강진, 영암으로 왕래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남천교는 조선시대 석교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교로 개축되었다. 지금의 남천교는 해남읍 읍내리에서 해남천을 건너 평동리와 삼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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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에 있는 법정리. 노송리(老松里)는 병자호란 때 창의한 김안방, 김안우, 김선지, 김연지가 청주화의(淸州和議) 소식에 비분강개하고 충절을 다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마을 뒤 주성산에 노송을 심고 종신하므로 노송정(老松亭)이라 부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이면의 노송리, 석연리, 구교리, 금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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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해남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1월 고부군에서 발생한 고부민란에서 비롯되었다. 고부민란 이후 전봉준과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이 3월 무장현에서 봉기하고 민중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당시 농민군은 관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4월 전주성을 점령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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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해남현감을 역임한 무신. 변협(邊協)[1528~1590]은 해남현감 재임 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군민들과 함께 해남읍성을 사수하였으며, 이후 전라우방어사(全羅右防禦使)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하였다. 변협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이다. 아버지는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변계윤(邊季胤)이며, 어머니는 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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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일원에 설치한 백제의 지방 행정구역. 6세기 백제가 해남 지방을 통치하면서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양무군조에 따르며 “침명현(浸溟縣)은 원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해남현(海南縣)이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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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법정리. 성내리(城內里)는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성문 안의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성내리의 자연마을인 성내마을은 해남읍성(海南邑城)의 성 안쪽에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내리의 자연마을인 서성마을은 읍성의 서문과 옹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성(城)의 서쪽 혹은 성내리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서성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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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관방 시설인 성터 유적. 성곽은 행정 시설물이면서 관방 시설물이다. 방어나 주둔이 목적인 성도 있겠지만 주둔하면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바로 행정성이 되기도 한다. 해남 지역의 성은 우선 읍성이나 치소성 등 행정 기능이 주가 되는 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영진보(營鎭堡) 등 군사 목적의 성도 있다. 산성의 경우는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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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조선시대 해남성의 남문루. 정원루(靖遠樓)는 해남군 해남읍 남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해남읍성의 남문루이다. 일제강점기에 해안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1469년 건립되었는데 정원루의 건립 시기는 해남읍성의 축성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원루의 남문 통에는 장시가 형성되었고 냇가에는 홍교가 있다. 정원루는 『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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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일원을 주축으로 하는 통일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통일신라 9주 가운데 무주[무진주, 지금의 광주광역시] 관할의 군현 수는 15군과 43현이었다. 당시 침명현(浸溟縣)은 양무군(陽武郡)과 영속관계에 있었다. 침명현은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에 개칭된 것이다. 주군현 간의 영속체제를 강화하면서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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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옥녀봉 정상에 있는 마한 또는 백제 시기의 산성. 해남 옥녀봉 토성(海南玉女峰土城)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와 삼산면 창리·신흥리의 경계에 있으며, 마한 또는 백제 시기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해남 옥녀봉 토성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와 삼산면 창리·신흥리의 경계에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녹산(綠山)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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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법정읍. 고려시대 침명현이 해남현(海南縣)으로 개칭되어 처음으로 ‘해남’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였다. 조선 초 직촌화 과정에서 황원군(黃原郡)·죽산현(竹山縣)과 통합되면서 현재의 해남이 시작되었다. 1409년(태종 9) 해남현이 진도군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이 되고, 1437년(세종 19) 해진군에서 해남과 진도가 분리되면서 해남현이 되었다. 현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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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에 있는 1437년 무렵 축성된 읍성. 해남읍성(海南邑城)은 세종 때 대대적으로 있었던 연해 고을의 읍성 축조와 시기를 같이하고 있다. 해남읍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하나였던 해남과 진도의 분군 시기인 1437년에 쌓기 시작하여 읍성의 남문루인 정원루(靖遠樓)가 완성된 1469년(예종 1) 사이 축성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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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 지역에 1437년에 조선시대 군현체제에 따라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 해진군(海珍郡)에서 해남과 진도가 분군되어 1437년(세종 19) 해남현(海南縣) 치소에 현감을 두게 된다. 해남현은 이후 지금의 형태를 갖추며 1895년 해남군으로 승격할 때까지 그 체제를 유지한다. 해진군은 중앙정부의 공도정책에 의해 1409년(태종 9)에 해남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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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법정리.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만조 때면 바닷물이 해남천(海南川)을 거슬러 올라왔다 하여 본래 ‘갯몰’, ‘바댓몰’이라고 불렸다. 한자식 지명에 따라 해리(海里)로 개칭하였다. 본래 군일면 지역에 속하여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리와 신교리·동외리·천변리의 각 일부를 붙여 해남군 해남면 해리로 개설되었다. 1955년 해남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