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70
한자 海南縣
영어공식명칭 Haenamhye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윤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437년 - 해남현 치소에 현감 임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해남현 해남군으로 승격
관할 지역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영암군

[정의]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 1437년에 조선시대 군현체제에 따라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

[개설]

해진군(海珍郡)에서 해남과 진도가 분군되어 1437년(세종 19) 해남현(海南縣) 치소에 현감을 두게 된다. 해남현은 이후 지금의 형태를 갖추며 1895년 해남군으로 승격할 때까지 그 체제를 유지한다.

해진군은 중앙정부의 공도정책에 의해 1409년(태종 9)에 해남현과 진도군과 합쳐져 개설되었으며, 1412년(태종 12)에는 치소를 옥산[지금의 삼산면 상가리 계동마을]으로 옮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해남현은 조선시대의 군현체제 개편에 의해 1437년 영암군에 속한 해남현으로 현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선 초기 중앙정부의 지배력을 지방에까지 확실히 미치기 위한 것이자, 연해 고을의 해안방어 체제를 갖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기록]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해남현 건치연혁조에 따르면 “본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으로 신라 때 침명[혹은 투빈]으로 고쳐 양무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 해남(海南)으로 고쳐 영암(靈巖)에 속하였고, 본조[조선]에 들어와 태종 9년[1409] 진도현과 합해 해진군이 되었다. 태종 12년[1412] 읍의 치소를 영암 땅 옥산에 옮겼고 세종 19년[1437]에 해남과 진도를 다시 분리시켜 해남현으로 삼고 현감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해남현은 본래 백제의 새금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침명현(浸溟縣)으로 고쳐서 양무(陽武)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해남으로 고쳐서 영암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태종 9년에 해남현을 합하여 해진군으로 하였고, 태종 12년 또 군(郡)을 영암의 속현(屬縣) 옥산(玉山)의 땅으로 옮겨 읍(邑)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내용]

지금의 해남군이 행정체계를 제대로 갖추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은 해남읍에 치소를 정하고서부터다. 1437년 지금의 해남읍에 현감을 두고 해남현이 된 이후 해남읍은 행정과 정치, 경제 등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해남은 고려시대까지 고해남현, 죽산현, 황원군 등 크게 3곳의 각각 분립된 행정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곳의 영역이 하나로 묶어진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조선 초기 송지 일대와 계곡, 옥천, 북일, 북평 일부 지역은 영암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해남의 영역이 현재의 영역과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해남의 영역을 놓고 볼 때 해남은 조선 초기의 해남현을 그 모체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해남현은 진도와의 분군에 따라 1437년 현 치소가 정해지고 현감이 파견된 이래 지금까지 그 기틀을 유지하고 있다.

[변천]

해남현은 1437년 해남읍에 현 치소가 정해지고 나서 해남읍성이 축조되었으며 해남읍성이 축조되는 과정을 보면 군현제도의 개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현의 읍치(治所)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읍성도 함께 축성되기 시작하며 이에 따라 1895년 해남군으로 승격할 때까지 해남현의 체제를 유지한다.

[의의와 평가]

1437년 현감이 파견되고 해남읍성이 축조된 이후 해남읍은 행정과 정치, 경제 등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해남현이 군현체제를 통해 정식으로 중앙정부에 편제됨으로써 해남은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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