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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63
한자 海南大興寺大雄寶殿
영어공식명칭 Haenam Daeheungsa Daeungbojeon
이칭/별칭 대웅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호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667년(현종 8)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중건
훼철|철거 시기/일시 1899년(광무 3)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소실
개축|증축 시기/일시 1900년(광무 4)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새로 지음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7~1969년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보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8년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보수 공사 실시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9월 19일연표보기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현 소재지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대흥사지도보기
성격 불전|전각
양식 다포계 팔작기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대흥사
관리자 대흥사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에 있는 조선 후기 대흥사의 중심 불전.

[개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海南大興寺大雄寶殿)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에 있는 조선 후기 대흥사의 중심 불전이다. 2008년 9월 1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대흥사 경내에 있다. 대흥사 북원(北院)의 중심 불전이자 대흥사 전역의 중심 불전이다. 금당천을 건너 침계루를 지나 북원 사역에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백설당·명부전·범종각·응진당·산신각·삼층석탑이 연이어 배치되어 있다.

[변천]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대둔사지(大芚寺誌)』[1823, 윤우·혜장·의순] 권 2와 「대둔사대웅전중건기(大芚寺大雄殿重建記)」[1668, 취여삼우(醉如三愚)]에 의하면 1667년(현종 8) 심수 대사(心粹大師)에 의하여 3년 만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1899년(광무 3) 서상실(西上室)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북원(北院) 전체의 건물이 모두 불에 탔고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도 이때 불에 탔다. 이후 1900년(광무 4) 육봉법한(六峯法翰)[1867~1942] 대사가 화주가 되어 새로 지었다. 취운혜오(翠雲慧悟)가 쓴 「대웅보전중수기(大雄寶殿重修記)」[1907]에 의하면 1899년(광무 3) 10월 14일 유시(酉時)에 서상실에서 일어난 불로 대웅보전이 하룻밤 사이에 전소되었다고 한다.

1900년 육봉법한 대사가 대화주가 되고 당시 관찰사 윤웅렬(尹雄烈)[1840~1911]과 해남군수 이용우(李容愚)가 대시주가 되어 중건 작업이 이루어졌다. 대웅보전 중건 불사에 관찰사나 군수의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황실의 전폭적인 후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웅보전의 중건 불사 책임을 맡고 있었던 육봉법한 대사는 황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서울을 12번이나 걸어서 왕래하였다고 한다. 육봉법한 대사의 정성이 갸륵하였던지 엄황비는 어린 영친왕을 위해서 기꺼이 중건 불사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후원받은 돈은 육봉법한 대사의 인솔 아래 서울에서 해남까지 운반되었다. 중건에 소요되는 비용이 막대하였던 만큼 쇠돈의 무게와 부피 또한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돈을 서울에서 여주까지 수레로 운반하였고, 여주에서 해남까지는 바다를 통해서 배로 운송하였으며, 다시 선착장인 해남 해창에서 대둔사[대흥사]까지는 짐꾼들이 지게로 옮겼다고 한다. 최근 개관한 대흥사 성보박물관에는 당시 황실의 후원을 뒷받침하는 3점의 황실원패(皇室圓牌)가 전시되어 있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기단에는 ‘광무팔년유월일두륜산대흥사대웅전축석중수(光武八年六月日頭輪山大興寺大雄殿築石重修)’[1904]라는 축석기가 새겨져 있다. 대시주 행군수는 이용우이고 석공은 이인준(李仁俊), 화주는 육봉이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1967~1969년 사이에 기와를 얹고 단청을 새로 하였다. 1998년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전반적인 보수 공사를 하였다.

[형태]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에 장대석으로 높이 쌓은 단 위에 기단을 마련하였다. 귀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상부에는 용머리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 후기적 특징을 보인다. 내부에 치장된 살미 운공 반자 널의 연화 운학 그림과 아울러 크게 휘어 올린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 낸 충량의 용머리 조각은 신령함을 더해 다소 과장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짝은 각 칸마다 빗살 격자무늬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문짝의 하단을 2단으로 나누어서 화려하게 치장한 ‘안상’과 ‘태극무늬’가 돋보이는 조각상이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의 다포계 건축이나 정면의 화려한 용머리 장식 등 여러 장식 요소가 다분히 혼합되는 등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중정식 가람 배치의 전형을 보여 주며, 중심에 서서 주변 경관에 적극적으로 조화되는 이른바 산사의 모범적인 사례로 등장한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은 두 글자씩 두 줄로 세로쓰기하였다. 큼직하게 새겨진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높다란 장대석 축단과 큰 규모의 전각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조선 후기의 명필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글씨로 행서체이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아미타·약사여래가 좌우로 협시한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63호, 약사불·아미타불·협시불 1612년, 석가불 17세기 중반경]이 봉안되어 있다. 불화는 1901년(광무 5) 봉안된 석가삼존후불탱화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제석천룡탱화·칠성탱화가 걸려 있다. 윤웅렬과 이용우는 후불탱화의 화기에도 등장한다. 윤웅렬은 대한제국 말기 정치가 윤치호의 아들이고 1901년 전라도관찰사였다. 1703년(숙종 29) 현재 대웅보전 내부의 보적사(寶積寺) 동종을 조성하였다. 1749년(영조 25) 대웅보전의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조성하였고, 1866년(고종 3) 대웅보전의 지장시왕도를 조성하였으며, 1900년에는 대웅보전에 여러 불화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900년 신헌구(申獻求)가 「대웅전중창상량문」을 지었으며 1907년 혜오가 「대웅보전중수기」를 작성하였다.

[대웅보전 현판 글씨 이야기]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840년(헌종 6)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기거하고 있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렀다. 이광사가 쓴 대웅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 주고 붓을 잡은 김에 왼편 백설당에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을 써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깨우침을 얻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집을 사과하며 다시 내다 걸게 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해남 대흥사에는 김정희와 절친하였던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어 김정희와의 교류가 이어졌으며, 이웃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과도 교류 관계가 이어져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석학들의 차와 학문·시·서화 등 예술의 교류는 한때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였다.

[현황]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건물 전체가 완전하게 보존되었고 현재도 종교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2008년 9월 1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안내판을 설치하여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고 감시 장치[CCTV]를 설치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관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에서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은 규모가 웅장하고 건축적으로도 매우 숙련도가 높은 건물이다. 화주를 맡은 육봉법한 대사가 불사를 이끌어 간 이야기들과 당시 현직 관찰사와 지역 군수까지 시주에 참여하고 아울러 황실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중건된 점 등에서 건축술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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