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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82
한자 赤良院
영어공식명칭 Jeongnyangw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할 지역 원호마을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 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원.

[제정 경위 및 목적]

적량원(赤良院)은 조선시대 남리역녹산역을 연결하는 교통, 통신을 위하여 설치된 숙소로서, 통행하는 관리들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 적량원은 “현의 서쪽 23리[약 9.03㎞]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18세기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기록이 전무하고 『해남읍지(海南邑誌)』에서는 적량원이 폐지[赤良院 在縣西二十三里今廢]되었음을 기록하였다.

[내용]

적량원은 교통의 교차 지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해남현에서 출발하여 남리역까지 가기 전의 대략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또한 계곡별진역에서 출발하여 삼산면녹산역을 거치지 않고 마산면 맹진을 거쳐 마산면 방면에서 남리역 방면으로 갈 경우 해남현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 원호마을이다.

황산면 원호리에 조선시대 원이 있었다고만 전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해남에서 살았던 윤이후(尹爾厚)[1636~1699]의 『지암일기(支菴日記)』에는 적량원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적량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지암일기』를 보면 윤이후는 양부인 윤예미의 묘를 돌보기 위해 아들들을 보내 자주 적량원을 왕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1692년(숙종 18) 8월 15일 “새벽에 기제사를 지냈다. 나는 간두로 가고 흥서는 적량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1692년 8월 25일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적량원에 갔다. 어머니께서는 술과 과일을 가지고 성묘하셨다.” 또 1692년 12월 27일 “석수 서필정이 적량원의 석물을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세운 값으로 조(租) 30석을 받아갔다.” 그런데 『지암일기』에 나오는 적량원황산면 원호마을에 있는 해남윤씨 윤이후 일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윤이후 일가 묘소는 원호마을 바로 앞의 국사봉 산자락 아래에 있다.

[변천]

적량원은 조선 초기에 원호리에 설치되어 17세기 무렵까지 존재하다가 18세기 들어 기록에서 사라져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적량원은 조선시대 남리역녹산역 간을 왕래하는 관리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였던 곳으로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남리역에서 맹진을 통하여 별진역으로 향할 때, 맹진 이전 원호에서 갈라지면 해남으로 향한다. 지암일기를 통해서 확실히 원호리에 적량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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