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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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泰元 |
영어공식명칭 | Kim Taewon |
이칭/별칭 | 집의당(集義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엄찬호 |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 출신의 의병장.
[개설]
김태원(金泰元)[1863~1933]은 1863년(철종 14) 영월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태원의 본관은 해풍(海豊)이며, 호는 집의당(集義堂)이다. 아버지는 김집(金鏶)이다.
[활동 사항]
김태원은 1895년 12월 21일 경기도 이천에서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신용희(申龍熙)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안성 지역에서 민승천(閔承天) 의진과 합세하는 등 의병을 모집하였다. 김태원 등은 1896년 1월 17일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고, 창의대장에는 민승천(閔承天)을 추대한 후 김태원은 선봉장을 맡았다.
이천수창의소 결성 다음 날인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이 이천을 공격하였다. 김태원 등 의병장들은 의병들이 아직 훈련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매복 작전을 펼쳤는데, 의병들은 늦은 밤까지 전투를 벌여 일본군 대다수를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2월 12일에 치러진 이현 전투에서는 일본군에게 패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에서 광주와 양근 의병진과 합세한 이천수장의소는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남한산성에서 물러나 영남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김태원은 남하하던 중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참여하고 있던 서상렬(徐相烈) 의병장을 만나 대열에 합류한 뒤 유인석과 함께 중국 서간도로 이동하였다.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으로 귀국한 김태원은 1906년 5월 최익현(崔益鉉) 의진의 소토장(召討將)을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07년에는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이 체포되자 원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1933년 3월 1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태원의 저술로는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태원의 공적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