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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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越- 東學 思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엄찬호 |
[정의]
영월 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서 지역에서 다시 동학이 부흥된 과정과 관련 인물.
[개설]
‘동학’이란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서학(西學)[천주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는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동학 교조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득도하였고, 최제우의 종교적 체험이 동학 창도의 기점이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으로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유(儒)·불(佛)·선(仙) 3교의 사상을 융합하여 통일하는 사상을 우리 민족의 경천사상에서 찾았으며, 또한 전통적 민간신앙 요소도 널리 결합시킴으로서 동학이 전파되게 하였다.
[동학의 탄생과 탄압]
동학이 널리 영·호남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종교로 대두된 데는 조선왕조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변동기의 불안이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동학이 주장하는 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신앙을 통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후천개벽을 주장하며 적서나 반상의 차별 없이 누구나 천주를 마음에 모시면 신분에 관계없이 만민평등을 이룬다고 역설하였다.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평등과 민본정신을 본질로 하는 위민개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동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교조인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고 난후부터는 경상도 북부 지방인 포항, 영해[현재의 영덕]를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복원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 후 1871년에 동학교인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동학은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그나마 근근이 닦아 놓은 포교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학의 조직 복원 운동]
교조 수운 최제우의 죽음 이후 어렵게 만들어 놓은 기반을 잃고 난 1870년경부터는 강원도 영서 지방을 근거로 하여 조직 복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강원도 출신 인물들이 동학의 조직 복원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강원도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는 계기는 최제우와 함께 체포되었던 이경화(李慶化)가 영월로 정배됨으로써 마련되었다. 이경화는 1864년 3월 무렵 정배된 영월 소밀원(蘇密院)[상동읍 화원리]을 중심으로 동학을 포교하였다. 이 때 이경화는 원주 사람 장기서(張基瑞)를 입교시켰는데, 장기서는 강원 지역에서 최초로 동학교인이 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 후 1864년 10월 양양 출신의 동학 교도인 공근석(孔根錫)이 영양(英陽) 용화동(龍化洞) 상죽현(上竹峴)에 있던 최제우의 유족을 데리고 소밀원으로 피신하였는데, 소밀원에서 생활하게 된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 딸은 이곳에 살고 있던 도인 장기서의 도움을 받았다. 이때부터 영월은 문경작변과 최제우의 장남 최세정(崔世貞)이 양양에서 체포된 1872년까지 우리나라 동학교단의 실질적인 중심지가 되었고, 동학의 활동 영역은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부터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영월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강원도 영월과 정선 지역은 관의 지목을 피하여 피신과 잠복을 거듭하였던 동학교단의 지도자와 교도들의 피신처 역할을 하였으며 조직의 복원과 교세 확장의 기반을 제공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의 동학 포교]
강원도 지역에서 동학이 본격적으로 포교되기 시작한 것은 1869년 3월부터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강수(姜洙)와 함께 이필제의 난을 피하여 태백산으로 가던 도중 1년 10개월간 은거하여 체류하면서부터이다. 최시형은 동학교문 기초의 확립과 교세 확장에 전력을 다하여 전국 각지에 교구제(敎區制)로서 포제(包制)를 실시하였으며, 각 포에는 접주를 두어 통솔케 하였다. 이때 강원도에는 관동대접주로 이철우(李哲雨), 홍천과 인제의 도접주로 차기석(車基錫)·김치운(金致雲)이 포명을 받았다.
당시 최시형은 최시형을 붙잡으려는 관의 추격이 확대된 상황에서 교조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동학교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교단 재건의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더더욱 피신과 은신을 병행하면서도 동학의 명맥을 이으려면 끊임없는 포교가 이루어져야 하므로 최시형 자신은 물론 최시형을 따르는 동학교인들에게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을 최대한 억제하도록 하며 오로지 교조의 뜻을 받들어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어 최시형이 양양으로 거처를 옮기자 1869년 2월에 양양 사람 최혜근(崔惠根)·김경서(金慶瑞)가 최시형을 찾아가 이르기를 “소생 등이 입도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도 닦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선생을 찾아왔나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시형이 그 연원을 물으니 “공생(孔生)이라 칭하는 사람이 입도를 권하는 말에 의하여 도에 참여한 이래 삼칠자(三七字)를 외울 뿐이요, 절차를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최시형이 도의(道義)를 순순히 설명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이 최시형에게 양양 포덕(布德)을 역설하고, 같이 가 주기를 간청하므로 최시형 또한 영동 방면에 포덕의 뜻을 둔 지 오래되어 박춘서(朴春瑞)를 데리고 양양으로 가서 30여 호의 포덕을 얻고, 그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양양 산중에 은거하며 치성(致誠)과 송주(誦呪)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시형은 양양 지역으로 자주 왕래하면서 포교를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양양과 영월을 강원도 지역 포교의 근거지로 하였으나, 후에는 양양·인제·홍천·횡성·원주·영월·정선 등 강원도 각지에 이르러 포교 활동을 하였다.
[영월에서 다시 태어난 동학]
1871년에는 이필제가 대신사(大神師) 최제우(崔濟愚)의 원을 푼다는 명목 아래 문경에서 관아를 공격하자 최시형은 강시원(姜時元)과 함께 이를 피하여 채삼인으로 가장하고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단양을 거쳐 영월군 산솔면 직동리의 산 중턱에 있는 바위굴에 은거하면서 식량을 얻지 못하여 초근목피로 15일 간을 연명하였다. 그 후 영월의 정일진(鄭一進)의 집으로 옮겨 거하다가 다시 영월 직곡리(稷谷里) 박용걸(朴龍傑)의 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박용걸의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최시형은 박용걸의 부친과 의형제를 맺고 교리를 설명하여 입도식(入道式)을 거행하였으며, 49일 기도제를 지내는 동안 각지의 도인들을 모아 놓고 동학의 교리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최시형은 박용걸을 만남으로써 동학 재건의 기틀을 강원도에서 마련하게 되었고, 이후 영월신씨 가문의 신시일(辛時一)과 신씨 가문의 여러 사람들, 그리고 유시헌(劉時憲)[유인상(劉寅常)]을 교도로 입교시킴으로써 영월·정선 지역 포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밀고하는 자가 있어 최시형은 체포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수리(首吏) 지달준(池達俊)의 도움으로 화를 면한 후 영월을 안전지대로 여기고 그 후 오랫동안 영월에 체류하면서 포덕하였다. 영월은 1864년 3월에 최제우의 제자 이경화가 귀양을 온 후 포교 활동을 펼친 지역이었으며, 1872년 김연국(金演局)을 비롯한 인제와 양구의 교인들이 피신하여 와서 은신하였던 영춘 장현곡(獐峴谷)과 정선 접주 유시헌의 집이 있는 무은담 등과 함께 강원도 동학교단의 비밀 포교지였던 곳이다.
1873년 10월 최시형은 강수·유인상·전성문(全聖文)·김해성(金海成) 등을 데리고 태백산 갈래사(葛來寺) 적조암(寂照庵)에서 49일간의 공부를 마치니 이때 동학의 내쌍구(內雙句)가 만들어졌다. 한편 각지의 교도들을 불러 수련회를 갖는 등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는데, 최제우가 사형당한 3월 10일, 득도일인 4월 5일, 탄생일인 10월 28일에 정기 모임을 갖고 집회를 열었다.
1875년 2월 그믐께 최시형은 송고동으로 옮겼고, 8월 보름에는 새 출발을 다짐하는 제례를 올렸다. 10월 18일에는 종교적 의례를 제도화하는 고천제례를 올렸는데, 선도(仙道)에서 본 딴 법복을 입고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는 삼층관을 만들어쓰고 소찬(素饌)에다 향을 피운 다음 촉(燭)을 밝히고, 초헌·아헌·종헌 그리고 대축을 읽는 순서로 천제를 올렸다. 제례 후 강수를 도차주(道次主)로 임명하고 나서 “시(時) 자를 써서 이름을 고치고, 활(活)자를 써서 자(字)를 고치도록 하여 우선 3인을 개명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사는 시형(時亨)으로, 강수는 시원(時元)으로, 유인상은 시헌(時憲)으로 이름을 고치고 나머지 9명도 훗날 차례로 이름을 고쳤으나 자는 고치지 않았다. 11월 13일에는 정선 유시헌의 집으로 가서 고천제례를 마치고 유시헌을 정선 접주로, 김계원을 인제 접주로 임명하였다.
그 후 최시형은 인제로 옮겨 인제군 남면 무의매리(舞依梅里) 김병내(金秉鼐)의 집에서 최제우의 조난향례를 치렀으며 이후로도 인제를 중심으로 은거하면서 인제 지역에 많은 포덕과 교화를 수행하였다. 1876년 4월 5일에는 인제 남면의 동학교도인 김연호(金演鎬)의 집에서 교조인 최제우의 득도향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77년 10월 3일에는 고천제례의 명칭을 구성제(九星祭)로 고쳤고, 1878년 7월 25일에는 정선 유시헌의 집에서 대신사 때 파접(罷接)했던 접회(接會)를 다시 열었다. 이 날의 주제는 시천주(侍天主)의 시(侍)자 해석이었다. 신사는 “시(侍) 자를 여하히 해석함이 가하냐, 포태의 시, 차(此)를 즉 시 자의 의(意)로 해함이 가하랴, 낙지(落地) 이후에 처음으로 시(侍) 자의 의가 성립될까, 우는 대신사 포덕 강령(降靈)의 일에 시(侍), 시(侍)됨이 가하랴, 제군은 차의(此意)를 연구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향치제(一香致祭)에 위를 설하되 벽을 의함이 가하랴, 아를 향함이 가(可)하랴.”도 생각하여 보라고 하였다.
1879년 3월에 신사는 강시원과 김연국을 대동하고 영서 지역을 순회하면서 많은 도인을 수습하였다. 10월에는 구성제를 인등제(引燈祭)로 바꾸었으며 음식 차림을 철폐하고 쌀과 천을 차려 놓도록 하였다. 우선 유시헌과 홍시래(洪時來), 최시경(崔時敬)의 집에서 소인등제(小引燈祭)를 올려 보았다. 인등제를 한번 올리면 49일간 기도드린 효과가 있다 하여 많은 도인들이 환영하였다. 이후 해마다 10월과 11월에 인등제를 올리게 되었고 동학의 의례 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최시형이 인제군 남면 갑둔리에 재차 온 것은 1879년 4월로서 최시형을 따르는 강시원, 김연국과 함께 경북 청송을 출발하여 영월 하동면 거석리 노정식(盧貞植)의 집을 거쳐 인제 남면 갑둔리에 이르러 김현수·조시철의 집을 중심으로 2년간 포교활동을 하였다. 1879년 3월 9일 최시형이 노정식의 집에서 잠을 잘 때 이경(二更)에 즈음하여 최제우 대신사의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879년 3월 10일 영월을 출발하여 정선 유시헌의 집에 들른 후 남면 갑둔리의 김현수의 집에 도착하자 인제 지역의 동학교인들이 최시형에게 기도식을 봉행하여 줄 것을 청하였고 최시형은 교인들의 정성을 받아들여 기도식 봉행뿐 아니라 설법까지 행하였다. 그리고 1879년 11월 20일에는 조시철의 집에서 치성식을 거행한 후에는 “일찍 대선사께서 항상 포교에 주의하사 우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천도의 운이 북방에 있고 우리 도의 발전할 수명이 옹치격(雍齒格)으로 되어 있으므로 너희는 일을 할 때에 이 격을 잃지 말라’ 하셨으니 우리는 항상 스승의 교훈을 잊지 말 것이라.”라는 교훈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때 제사를 올릴 때 초헌으로 김계원이, 아헌은 장춘보가, 종헌은 김치운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1880년 5월에는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 경전간행소를 설치하고 경전을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1970년대 후반 동학교단은 영월·정선 등 영서 지방의 비밀 포교지를 중심으로 교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의 제2대 교조 최시형이 1869년부터 1890년까지 강원도 내에서 포교 활동을 함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강원도 내에서의 동학의 활동은 곧 동학 전체의 큰 흐름이었고, 동학은 강원도 내에서 그 교리를 완성하고 전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