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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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석 |
[정의]
전라북도 무주 출신이거나 무주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봉양한 자녀.
[개설]
한자 문화권에서 효(孝)는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뜻한다. 잘 공경하고 받들고, 모시고, 봉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공자(孔子)는 효에 대해 “어김이 없는 것[無違]”으로, “예(禮)로써 섬기는 것”[『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이라고 하였다. 부모를 대함에 예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 효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논어』 학이편(學而篇)에서는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서고서 도가 생겨난다. 효와 제(悌)가 그 인(仁)의 근본이 된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인이란 인간다운 도리를 지키는 것이고, 가장 근본적인 덕목이 효라는 것이다. 결국 효란 ‘사람으로서의 도리’, 그것도 부모에 대한 지극한 도리, 마땅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고 하겠다. 근원적으로 효(孝)로써 인(仁)을 세우고, 인으로써 도의 근본을 삼으니, 효란 세상 모든 이치의 근본이요, 가장 중심이 되는 가치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도 효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 효와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불설우란분경(佛設盂蘭盆經)』이다. 불교에서의 효는 모든 생명에로 향하고 있다. 즉 생명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과 자비이다. 이것이 불교의 효이다. 인륜, 천륜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인 효에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향한 대자비라는 가피(加被)를 더하였고, 나아가 모든 생명을 고통에서 제도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의 승려인 원광(圓光)이 지은 ‘세속 오계(世俗五戒)’에도 ‘사친이효(事親以孝)’라고 하여 효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효는 전통 시대 우리나라의 사상적 기반인 불교나 유교에서 모두 강조하였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부모가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모신다는 말은 ‘사사여생(事死如生)’, 즉 돌아가신 부모를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여막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는 의미이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여 적극 장려하였으며, 각 관서로 하여금 효자(孝子)·충신(忠信)·열부(烈夫)·열녀(烈女)를 조사하여 조정에 올리고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정려가 허락되면 그 가문에 대해서는 증직을 하거나 조세와 균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렇듯 효도를 중요시한 조선 시대의 문화적인 전통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효자를 낳았고, 그들의 지극한 효심은 학자들의 문집에 담기거나 효자비(孝子碑)의 비문에 실려서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덕행(德行)의 표준이 되어 왔다.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서도 많은 효자와 열녀 등이 나왔으며, 국가에서 정려를 받기도 하였다.
[무주 지역의 효자와 정려]
무주 지역에서 알려진 효자로는 강남대(姜南大), 김국희(金國禧), 김달규(金達圭), 김병두(金炳斗), 박권(朴權), 박삼(朴森), 서인주(徐仁周), 유경제(柳景堤), 유봉증(柳鳳增), 유홍증(柳鴻增), 이만경(李晩景), 송계원(宋桂元), 정기인(鄭基仁), 최익붕(崔翼鵬) 등이 있다.
강남대(姜南大)[1887~1950]의 본관은 진주(晋州), 호는 대악(大岳)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 유평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배워 예의가 바르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국희(金國禧)[1773~1798]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희원(喜元)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서 출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김재선이 병으로 눕자 병구완에 온 정력을 다 쏟았다.
김달규(金達圭)[1841~1936]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영재(永載), 호는 은천(隱川)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내도리 굴천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다.
김병두(金炳斗)[1843~1923]의 본관은 김해, 자는 성재(聖哉), 호는 덕암(德庵)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증통정대부 호조 참의 일제(一濟) 김국윤(金國允)이며, 아버지는 증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의금부 지사(義禁府支社) 조은 김창신이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극진하였다.
박권(朴權)[1747~1822]의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운곡(雲谷)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르게 두터웠고, 부모님이 별세하자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1891년(고종 28) 통훈대부 사복사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박삼(朴森)[1761~1832]의 본관은 밀양, 자는 여삼(汝三), 호는 운촌(雲村)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출생하였다. 형은 박권(朴權)이다.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모가 별세하자 형 박권과 함께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서인주(徐仁周)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귀계(龜溪) 서침(徐沈)의 후손이다. 효성이 극진하여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부친상을 당하여 상중에 모든 절차를 예도(禮道)에 따라 거행하였다. 아버지의 삼우제 날 산소에서 얻은 임자 없는 소가 쌍둥이 송아지를 잇달아 낳아 삼상(三祥)의 제수(祭需)로 사용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효성에 대한 감동으로 빚어진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후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으며, 1777년(정조 1)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유경제(柳景堤)[1802~1856]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화중(和中)이다. 13세 되던 해 작은집에 양자(養子)로 가게 되었는데, 효심이 극진하여 친가와 양가의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양부가 노환으로 운명 직전에 이르자 왼쪽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여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고, 생부의 운명 전에는 오른쪽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연명케 하였다. 1892년(고종 29) 건립한 유경제 효자각이 전라북도 무주읍 당산리 원당산 마을에 있다.
유봉증(柳鳳增)[1830~1856]의 본관은 문화, 자는 명국(鳴國)이다. 아버지는 돈령부 동지사(敦令府同知事) 유도(柳燾)이다. 1848년(현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880년(고종 17)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유홍증(柳鴻增)[1850~1879]의 본관은 문화, 자는 익여(翼汝)이다. 형은 유봉증, 유학증이다. 유봉증 역시 효자로 이름났다. 유학증이 장수 현감(長水縣監)으로 관직에 머물러 있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꿈을 버리고 부모를 공양하였다. 효와 행실이 큰형 유봉증과 비교되어 난형난제(難兄難弟)였다고 한다. 유봉증과 함께 연정되었다.
이만경(李晩景)[1691~1776]의 본관은 흥양(興陽), 호는 두촌(斗村)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출생하였다. 충성심이 강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송계원(宋桂元)[1731~1792]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굴암리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여 아버지가 노환(老患)으로 병중에 있을 때 간호에 온 정성을 다했고, 겨울에 부친이 수박을 원하자 수박을 구하여 아버지를 공양한 갸륵한 효성이 널리 알려져 1872년(고종 9) 정려가 내렸다.
정기인(鄭基仁)[1862~1924]의 자는 경오(敬五)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덕산리 수락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나 농사일과 행상(行商)으로 어려운 가정을 꾸려 가면서도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모시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최익붕(崔翼鵬)[1810~1872]의 본관은 전주, 초명은 최승대(崔承垈), 호는 송포(松圃)이다. 죽헌공(竹軒公) 최활(崔活)의 후손이다. 효심이 극진하여 아버지가 병환 중에는 대변 맛을 보며 증세를 살폈을 뿐 아니라 운명 직전의 아버지를 위해 손가락을 찢어 부족한 피를 보충하였으며, 상중(喪中)에는 슬퍼함이 끝이 없었다고 한다. 1970년 최익붕 효자비를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고도 마을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