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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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柳里文化柳氏孝烈四旌閣 |
영어공식명칭 | Munhwa Yussi Hyoyeol Sajeonggak in Samyu-ri |
이칭/별칭 | 문화사정(文化四旌),사유정(四柳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183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범호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6년 8월 - 삼유리 문화유씨 효열 사정각 복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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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삼유리 문화유씨 효열 사정각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1833 |
성격 | 정려각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문화유씨 문중 |
관리자 | 문화유씨 문중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문화유씨 가문의 효열 사정각.
[개설]
문화유씨(文化柳氏) 문중의 효열(孝烈) 네 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문화사정(文化四旌)’ 또는 ‘사유정(四柳亭)’으로 불린다. 1861년(철종 12) 유한태(柳漢泰)의 처 현풍 곽씨(玄風郭氏)[1755~1821]가 효부(孝婦)로 정려된 이듬해 문중에 의해 마을 입구에 홍문(紅門)이 건립되었다. 그 뒤 1883년(고종 20) 유봉증(柳鳳增)[1830~1856]과 유홍증(柳鴻增)[1850~1879] 형제가 효자로 정려되었다. 1885년(고종 22) 유최영(柳最榮)의 처 풍천 임씨(豊川任氏)[1780~1830]가 효부로 정려되었다.
효부 현풍 곽씨는 일찍이 남편을 사별하게 되자 남편을 따라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지성으로 봉양해 달라”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죽지 못하고 평생의 한으로 여기며 살았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하면서 종가의 조카를 입양하여 대를 잇게 하는 등 효행을 다하였다. 비록 늙고 병들어 위중하여도 맛있는 음식을 가까이 하지 않는 등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자손들에게 효(孝)와 열(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겸비할 것을 가르쳤다. 1861년 ‘효부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문화 유한태 처 증숙부인 현풍 곽씨지려(孝婦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謙經筵參贊官文化柳漢泰處贈淑夫人玄風郭氏之閭)’로 명정되었다.
효부 풍천 임씨는 성품이 곱고 순하였으며 시어머니를 극진한 정성으로 섬기며 효성을 다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먹고살기가 힘들었지만, 밤낮으로 부지런히 길쌈을 하여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고사리를 좋아하는 시어머니를 위해 깊은 산중을 헤맸는데,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가까운 뒷산에 별안간 고사리 싹이 올라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공양하였다. 이를 두고 이웃 사람들은 효행의 감동으로 빚어진 일이라 하며 맹순(孟荀)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시어머니의 상중에는 그 슬픔이 애절하였고, 맨밥으로 연명하면서 상제로 삼년상을 치렀다. 1885년 ‘효부 증가선대부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 오위 도총부총관 문화 유최영지처 증정부인 풍천 임씨지려(孝婦贈嘉善大夫戶曹參判謙同知義禁府五衛都摠府總管文化柳最榮之妻贈貞夫人豊川任氏之閭)’로 명정되었다.
효자 유봉증은 본관은 문화, 자는 명국(鳴國)으로 돈녕부동지사(敦令府同知事) 유도(柳燾)의 아들이다. 1848년(현종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천경(天敬)’이라는 글을 쓰고 “어버이를 하늘같이 공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병에 걸려 무섭고 두려워도 부모가 걱정할까 봐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병이 깊어 죽음에 임박하여 말을 할 수 없어도 부모의 안위를 묻고 숨을 거두었다. 1880년(고종 17) 효행으로 ‘효자 성균생원 증통정대부 사헌부 감찰 문화 유봉증지려(孝子 成均生員贈通政大夫司憲府監察文化柳奉增之閭)’로 명정되고, 1884년(고종 21) 동생 유홍증과 함께 연정되었다.
효자 유홍증은 자는 익여(翼汝)이며 유봉증의 동생이다. 어릴 적부터 형을 본받아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형을 부모와 같이 공경하여 모든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형에게 물어보고 하였다. 큰형 유봉증이 종가(宗家)로 입양된 후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은 형에게 보답의 정성을 펴지 못한 것을 늘 애석하게 여겼다. 작은 형 유학증은 장수 현감(長水縣監)으로 관직에 머물러 있어, 가정을 지키기 위해 꿈을 버리고 부모를 공양하였다. 1880년 사림에서 효행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에 증직되고, 1883년 ‘효자 학생 증동몽교관 조봉대부 문화 유홍증지려(孝子學生贈童蒙敎官朝奉大夫文化柳鴻增之閭)’로 명정되었다. 그 이듬해 1884년 형 유봉증과 함께 연정되었다.
[위치]
삼유리 문화유씨 효열 사정각(三柳里文化柳氏孝烈四旌閣)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상유 마을 입구 표지석에서 중유 마을 방향으로 25m 이동하면 우측에 위치한다.
[변천]
1919년 문중에서 정문을 보수하고 홍살을 붙여 네 명의 현액을 연정(聯旌)하였다. 1986년 8월 실화로 불에 탄 후 복구되었다.
[형태]
정면 2칸, 옆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정려각으로 크기는 정면 420㎝이고, 옆면 206㎝이다.
[현황]
삼유리 문화유씨 효열 사정각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유리 상유 마을 입구에 정려각의 형태로 보전되어 있다. 문화유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