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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1065
한자 李元廈
영어음역 Yi Wonha
이칭/별칭 치택(致澤)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2001년연표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좌의진 중군장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활동 사항]

이원하(李元廈)는 자는 치택(致澤)이며,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일찍이 오위의 사과(司果)를 거친 전직 관료로, 총을 잘 쏘았고 동학 농민 운동에도 가담한 적이 있으며 향중에 중망이 높았다고 한다.

단발령 이후 지평 출신의 포군을 기반으로 봉기한 제천의진의 지도자 안승우(安承禹)의 권유를 받고 의병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때 이원하는 이미 영서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하던 민용호에게 평창유진장(平昌留陣將)으로 임명된 후였다. 더욱이 민용호안승우와 경쟁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관동의진 쪽에서는 호좌의진에서 자신의 군사를 빼돌렸다고 비난하였다. 이 문제는 훗날까지 관동의진과 호좌의진이 갈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승우 등이 이끌던 의진이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으로 재편성된 후, 친일적인 개화 관료를 처단하고 충주성을 공략할 때 우기정(禹冀鼎)·이호승 등과 함께 민병을 이끌고 참여하였는데, 이때 이원하는 평창 지역의 농민들을 모집하여 의진을 지원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충주성에서 물러선 후로는 원주에 머물며 활동하던 별모장 이필희(李弼熙)의 중군이 되어 원주를 경계하며 지켰다.

1896년(고종 33) 5월 제천 의병이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긴 후, 원용석의 뒤를 이어 한때 중군장을 맡을 만큼 유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해 2월 일본군을 끌어들여 의병을 진압하려 한 전 평창 현감 엄문환을 사로잡아 효수하였는데, 엄문환은 한때 위기에 처한 이원하(李元廈)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 처신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후에 관군에게 자수하였으나 처형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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