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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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錫胤 |
이칭/별칭 | 윤지(胤之),낙정(樂靜齋),문효(文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 증조할아버지는 조응두(趙應斗), 할아버지는 조충(趙冲)이며, 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조정호(趙廷虎)이고, 어머니는 군수 심은(沈訔)의 딸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부인은 부윤 민기(閔機)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백운에 자리 잡은 민광훈(閔光勳)과 처남 매부 사이이다.
[활동 사항]
조석윤(趙錫胤)[1606~1655]은 장유(張維)·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입격하고, 1628년(인조 6)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직전에는 호인들에 대한 기미 정책에 반대하고 척화 내수(斥和內修)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8년 한때 진주·안변 등지의 수령을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교리·장령·사간·전한·승지·이조 참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면서, 원손의 심양(瀋陽) 인질을 적극 반대하고 강화도 사절자(死節者)의 부모처자에 대한 구제책의 강구를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여러 궁가(宮家)나 아문(衙門)이 차지하고 있던 염분(鹽盆)·어전(魚箭) 등의 혁파로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해야 된다는 등의 많은 업적도 남겼다. 1640년(인조 18) 소현 세자와 원손을 교체하는 일을 반대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1646년 대사성이 되고,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다. 1649년(효종 1) 김상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양관 대제학이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 대사간·대사헌을 여러 차례 지냈는데, 1650년 이경억(李慶億)이 왕에게 여색을 멀리하라고 건의하다가 미움을 사자 이를 적극 신구(伸救)하다가 파직되어 임천(林川)으로 귀양갔다.
이 후 김육(金堉) 등의 신구로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뒤 대사간·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대사헌을 거쳐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판서인 정세규(鄭世䂓)를 비방하다가 호당(護黨)의 혐의로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강계로 옮겨졌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53년 대사성이 되고, 곧 이어 대사헌과 좌부 빈객(左副賓客)까지 겸하였다. 그러나 다시 서원리(徐元履)와 뜻이 맞지 않아 다투다가 종성부사로 밀려났다. 성균관 유생 및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등의 간청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655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장악하고 대간의 지위에 있었으며 성균관의 책임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일을 당하여 진언하기를 피하지 않아 때로 왕의 뜻에 거슬려 남북으로 귀양갔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정개결(怡靜介潔)[온화하면서 조용하고 절개가 있으면서 깨끗함]한 인물로 당시 사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인 『낙정집(樂靜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금천 도산서원(道山書院), 안변 옥동서원(玉洞書院), 종성 종산서원(鐘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