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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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道寺 |
영어공식명칭 | Seongdo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백도로 543-134[동해리 산49-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호균 |
건립 시기/일시 | 420~427년 - 성도사 백제 구이신왕 시기 아도화상이 성도암으로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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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찰 시기/일시 | 1950년 - 성도사 6·25전쟁 때 폐찰 |
중수|중창 시기/일시 | 2006년 - 성도사 복원 |
현 소재지 | 성도사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백도로 543-134[동해리 산49-6] |
성격 | 사찰 |
창건자 | 아도화상 |
전화 | 061-535-1037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에 있는 대한불교원효종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성도사(成道寺)는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였던 성도암(成道庵)으로 백제 구이신왕[?~427]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흥사의 만일암 창건 10년 후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으나, 이에 대한 기록 역시 전하지 않고 있다. 또 고려 중기에 중창되었다고 하나 이 또한 믿을 수 없다. 다만 조선 말 응화 선사가 중창하였다는 『동사열전』의 기록은 참고할 만하다. 성도사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초의·하의·범해·연주 선사 등 많은 고승이 정진했던 곳으로 호남 지역 대표적인 불교 성지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 13대강사들이 화엄 법회를 열기 전에 반드시 성도사에서 참선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성도사 승려들은 하루 한 끼 공양으로 수도에만 정진하고 있다. 성도사는 불교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구한말 의병 활동과 농민운동의 중심지로 역사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1909년 의병장 황일두 장군 등 의병 100명이 성도사에서 일본군들과 격전을 벌이다 식량이 떨어져 근처 심적암으로 후퇴하다 모두 순국한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전남 지역 농민 대표들이 성도사에 모여 항일 농민운동의 핵심 단체인 전남협의회를 결성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남협의회가 결성된 뒤 강진, 해남, 목포, 순천, 여수 등 9개 시·군 회원 580여 명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 일로 성도사는 폐허가 되었고, 토지들도 몰수당하였다.
성도사는 6·25전쟁 때는 좌익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해남 지역 좌익의 지도자인 신동기가 성도사에 숨어 있다가 생포되었고, 성도사는 경찰의 공격에 불에 타 없어져 폐사되었다. 그 뒤 1957년 불심이 강한 보살이 죽담으로 지은 것을 1992년 4월에 승려 화광이 목제 함석으로 중수하였다. 화광이 성도사 대지를 매입하여 전기 시설을 하고 법당과 요사채를 짓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방해와 고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최근 군비 등이 지원되어 복원이 이루어졌다.
『대둔사지』에는 “성도암은 임해령(臨海嶺) 바깥 3리쯤에 있으며 석벽이 두절하여 쇠줄로 사다리를 놓았다. 항상 선객 5~6인이 살았으며, 소나무 잎을 먹고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선방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직각의 석벽 사다리를 이용하여 올라가야 한다. 봉암낙현(鳳巖樂賢)[?~1794]이 18세기 중반·후반 경에 해남 두륜산 대흥사 성도암에서 수도 정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최눌이 송광사(松廣寺) 보조암(普照庵)에서 입적하자, 상중에 행하는 모든 의식을 주관한 뒤 다시 성도암으로 돌아가서 수행하다가 입적하였다. 색난(色蘭)이 1698년에 해남 성도암 목조보살좌상[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제주도 관음사 봉안]을 불상에 다시 금칠하였고, 1700년에 해남 성도암에 나한상[영암 축성암 목조나반존자상]을 완성하였다. 심한유한(心垾有閑)[1813년~1885년]이 성도암을 중건하였다. 오래전부터 보관하여 오고 있다는 금동반가사유상과 석불입상이 보존되어 있다. 기록에는 낭암시연의 부도와 송월치익 선사 비가 건립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부도를 세웠던 터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도사는 신통한 나한도량이자 기도 도량으로 바른 기도를 하면 꼭 소원이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성도사는 나한의 현신과 관련된 전설들이 많이 전해진다. 절 내에는 2005년부터 불사를 하여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고, 금강선원은 2008년에 개원하였다. 대웅전을 찾아가는 길목에는 큰 바위 두 개가 좌우로 서 있어 마치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자아낸다. 2007년 ‘항일 운동 격전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건립되지 못하였다. 성도사와 관련한 설화로는 여의주 바위, 동지 팥죽 공양, 쌀 나오는 구멍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금강선원[선방]을 운영하는 수행처여서 거주하는 승려는 일정하지 않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금강선원과 요사채 등이 있다. 청화(靑華)[성륜사 조실, 1924~2003]의 스승인 금타대선사(金陀大禪師)[1898~1948]의 비석과 육각오층석탑이 건립되었다. 여의주 바위와 보주가 있다. 요사채 위쪽에 있는 금강선원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곳으로 부처님 오신 날에만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관련 문화재]
성도사에는 금동반가사유상과 석불입상이 있다. 금동반가사유상[높이 32.8㎝]은 1990년 후반부터 성도사에서 모시고 있는 불상으로 현재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다. 성도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반가사유상[국보78호]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좀 더 세련된 선과 멋을 풍기고 있어 백제 때 조성된 불상이라 주장하고 있다. 석불입상은 성도사산신국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 바위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화광이 처음에 성도사에 올라왔을 때 죽담으로 된 1칸 방이 있었으며, 20여 년 동안 폐허가 된 절을 복원하면서 6·25전쟁 때 폐허가 된 잔재 속에서 석불입상만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석불입상에 대한 문헌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성도사에서는 고려 초기나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