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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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宣化仁 |
영어공식명칭 | Seon Hwa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월 7일 - 선화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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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04월 11일 - 선화인 해남읍 독립만세운동 참가 |
몰년 시기/일시 | 1943년 01월 15일 - 선화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 선화인 대통령표창 수훈 |
출생지 | 전라남도 진도군 삼촌면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 |
활동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면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4월 11일 해남 독립 만세 운동 참가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선화인(宣化仁)[1883~1943]은 1883년 1월 7일 해남군 삼산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1일 해남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활동 사항]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어서 지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4월 11일에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김동훈을 비롯한 청년들은 1919년 4월 1일 지역에서 신망이 높았던 안정석(安正錫)·안유석(安儒錫)을 찾아가 만세 시위를 논의하였고, 이형춘(李亨春)·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조종운(曺鐘運)·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이들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조종운·김흥봉·안창석·이형춘 등이 협의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1919년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1919년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김동훈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선화인도 해남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홍교(虹橋) 부근에서 김성철(金相喆)과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선화인은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1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笞) 90도(度)를 언도받았다.
선화인은 1943년 1월 1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2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화인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