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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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旅客船燕號浸沒事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종안 |
[정의]
1963년 1월 18일 전라남도 목포 허사도 앞바다에서 해남-목포 간 여객선이 침몰한 사건.
[역사적 배경]
도로교통 시설이 충분하지 않던 1960년대에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전라남도 목포시를 오가는 사람은 주로 정기 여객선을 이용하였다.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와 목포 간 항로를 오가는 여객선 연호(燕號)는 해남 지역의 황산면·산이면·해남읍 지역 주민들이 겪는 교통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운항되고 있었다.
[경과]
1963년 1월 18일 오전 열 시 무렵 연호리를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던 명진합명회사 소속 여객선 연호가 목포시 허사도 앞 해상에서 침몰하였다. 폭풍주의보가 발효되기 직전이어서 해상 날씨가 매우 나빴지만 설을 앞둔 대목이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운행한 결과였다. 당시 배에는 정원보다 무려 86명이 초과한 141명이 승선하고 있었으며, 150여 가마의 곡물까지 실은 과적 상태였다. 침몰 당시 부근을 지나던 여객선 용당호 관계자에 따르면, 강한 바람에 배가 기울어지자 선실까지 물이 들어왔고, 갑판에 있던 몇 사람은 뛰어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실에 갇힌 채 5분 안에 침몰했다고 했다.
사고 소식을 접한 목포해양경찰서에서는 구조정과 민간 선박 두 척을 출동하게 하였으나, 파도가 높아 구조는 쉽지 않았다. 허사도에 표착한 생존자 한 명만이 겨우 구조되었다. 계속되는 추위와 강한 바람으로 인양 작업마저 계속 지체되었다.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은 목포로 집결하여 모든 승객이 무사히 구조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결과]
허사도에 표착한 한 명을 제외한 140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해남 사람들이거나 해남을 근거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희생자 중 해남군 황산면의 정씨는 부모와 함께 평택으로 결혼식을 올리러 가던 길이었고, 화원면의 서씨는 목포에 쌀을 팔고 덜 받은 100원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화원면의 유가족 박씨는 아내와 일곱 살, 세 살 된 두 딸의 시신이 인양되자 오열하기도 했다. 끝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유가족도 부지기수였다.
당국에서는 사고의 원인이 정원 초과에 있으며, 배가 침몰한 것은 두 차례 불어닥친 돌풍으로 선체가 45도 이상 기울어졌고 선체의 부식도 심하였기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해운사에 대한 형사적 책임도 약속하였다. 침몰된 선체는 사고가 난 지 사흘이 지난 1963년 1월 21일에 발견되었으며, 설 당일인 26일에야 인양되었다. 선체 인양과 사체 수색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63년 2월 10일 오후 한 시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에서는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합동 위령제가 집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신을 찾지 못한 유가족이 상당수였다. 1963년 4월 11일 새벽 목포시 해안동에서 희생자 한 구가 마지막으로 발견되었으며, 아직 찾지 못한 미수습 희생자는 62명이다.
[의의와 평가]
여객선연호침몰사고는 미비한 규정과 느슨한 규제 속에서 오래된 선박을 무리하게 투입하고, 정원보다 많은 승객을 태우고 무리하게 운행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당국은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였고 재발 방지를 위해 힘쓰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해상 사고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967년에는 부산 가덕도에서 한일호가 침몰해 99명이 죽었으며, 1970년에는 남영호가 여수 근해에서 침몰하여 319명이 사망하였다. 1993년 위도에서 부안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근래에는 2014년 4월 13일에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해상에서 침몰해 300여 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강력한 규정을 마련하여 이러한 인재를 방지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