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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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舘頭浦 |
영어공식명칭 | Gwandupo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074년 - 관두포에서 김양일 송으로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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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29년 - 관두포에 해진성관 개설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87년 - 관두포에서 최부 제주도 출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9년 - 관두포에서 김상헌 제주도 출발 |
비정 지역 | 관두포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
성격 | 포구 |
관련 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에 있었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포구.
[개설]
관두포(舘頭浦)는 관두량, 관두, 관머리라고도 칭하며 조선시대 제주를 왕래하는 관리들이 이용했던 포구이다. 관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관을 설치하였다. 인근에는 봉화, 관터, 영터(營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관두포 관터는 화산면 관동리 944-2 쌍봉수산 인근이며, 선창은 동쪽 갯고랑이다. 관두포 부근의 관두산에는 관두산 봉화대가 있었으며 한겨울에도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관두산 풍혈이 있다. 관두포 관터 서쪽에는 영터가 있는데 수군이 주둔하면서 지켰던 곳이라 한다. 관두포 주변 영터에서는 조개무지와 청자, 백자 파편이 출토된다. 관두포의 정확한 위치는 한국전쟁 후 방조제가 들어서고 간척공사가 진행되어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명칭 유래]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관두산은 “현의 남쪽 41리[약 16.10㎞]에 있다[在縣南四十一里].”라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관두량은 “현의 남쪽 40리[약 15.71㎞]에 있으며 제주를 왕래하는 자가 이곳에서 바람을 기다린다[館頭梁南四十里 濟州往來者候風船泊於此].”라고 하였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제주를 왕래하는 배가 산밑에 머무른다[濟州往來船泊山下].”라고 하였는데, 관두포를 이용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표해록(漂海錄)』에서 최부(崔溥)[1454~1504]는 1487년(성종 18) 11월 11일 제주의 신임 목사(牧使)인 허희(許煕)와 함께 관두량에서 같이 배를 타고 12일 저녁에 제주의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였다[十一月十一日朝 與濟州新牧使許煕 同乘舟于館頭梁 十二日夕 到泊濟州朝天館]. 또,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1601년에 9일 동안 강진에서 제주로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했으나 도해(渡海) 준비가 부실하자 해남으로 이동하여 관두량에서 제주로 향하였다. 김상헌은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公行)은 반드시 강진의 백도도(白道島), 영암의 이진포(梨津浦), 해남의 관두량(館頭梁)에서 배를 탄다[凡往來濟州 公行, 必到此乘船. 海南則館頭梁 康津則白道島而 靈巖 梨津浦 又與康津 相接故待風者 皆留集于三處].”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군영포[백금포]를 이용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김성구(金聲久)[1641~1707]도 관두에서 배를 탔다[自海南 舘頭發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