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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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秉夏 |
영어음역 | Jeong Byeongha |
이칭/별칭 | 자화,남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윤모 |
[정의]
개항기 구로 지역 출신의 관리.
[가계]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자화(子華), 호는 남고(南皐). 중인(中人) 출신이다.
[활동사항]
1881년(고종 18) 조선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낼 때, 통상사무아문(通商事務衙門)의 관리로서 광산·조폐·제철·피혁 등에 관련된 기계의 구입을 위하여 오사카[大阪]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이후 1885년 12월부터 1888년 5월까지 지금의 구로 지역 일부를 관할하는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1886년에는 주사(主事)에서 사관으로, 1889년에는 협판(協辦)으로 승진하였다.
고종이 외국 사정을 즐겨 들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에 다녀온 관리들이 궁중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이들을 별입시(別入侍)라고 하였는데, 정병하도 여기에 포함되어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위안스카이[袁世凱]를 견제하려던 미국공사 폴크(Foulk, G. C.)와 깊은 관계를 맺기도 하고, 김양묵(金良默) 등과 함께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할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박정양(朴定陽)이 주미공사로 부임하여 위안스카이가 강요한 이른바 삼단(三端)을 무시한 일이 일어나자, 고종의 명령에 따라 위안스카이를 방문하여 경위를 밝히고, 청나라 공사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는 조건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외 부문에서 활동하면서, 궁중에 출입하며 다른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고 전환국과 광무국에 관여하면서 국고를 낭비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1888년 밀양부사로 부임하기 전에는 신병으로 경기도 안산에 있는 집에서 한동안 요양하였다. 1894년까지 밀양부사로 재임하면서, 나라가 상업으로 자강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동양과 서양의 농학을 종합하여 『농정촬요(農政撮要)』를 편찬하는 동시에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다. 1890년 전운사를 겸임하였고, 이운사(利運社)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30만 냥에 가까운 거두지 못한 세금을 완납하였고, 옛 향약을 토대로 밀주장정(密州章程)이라는 향약을 만들었다. 이때 극락전(極樂殿)이라는 불교 사찰을 건축하였다.
1894년 7월에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농상아문(農商衙門)의 협판으로 기용되었으며, 영남총무(嶺南總務)로 부세와 조운을 맡았다. 다음해 내장원장(內藏院長)과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을 겸임하였고, 친미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을 대신하여 대신서리가 되었다. 이 당시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나,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받아 왕실 재정을 맡았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8월 20일 궁중에 머무르면서, 일본인들의 입궐은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피하지 말도록 민비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또, 민비 폐비를 극청하고, 그 조칙(詔勅)을 썼다. 유길준(兪吉濬) 등이 고종에게 단발을 시범보이도록 강요하자, 고종이 정병하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하였다.
아관파천 후 역적으로 지명되어 이완용(李完用)의 심복인 총순(總巡) 소흥문(蘇興文)에게 경무청 문 앞 돌다리 위에서 피살되었고, 종로에 버려진 시신을 군중들이 돌로 치고 사지를 찢었다. 1907년 쇄신도화(刷新導和)라는 명분으로 조선통감에 의해 사후 사면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충희(忠僖)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