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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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界文化遺産暫定目錄-登載-民俗博物馆-牙山 外巖-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1월 7일 - 아산 외암마을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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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3월 - 아산 외암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
현 소재지 | 아산 외암마을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민속 마을.
[개설]
아산 외암마을은 이사종이 부친의 묘소를 송악산에 정한 후 온양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2000년 1월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외암민속마을보존회를 만들어 전통 보존과 마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을의 역사적·문화적 가치 등을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예안이씨의 입향과 외암마을의 형성]
‘외암(巍巖)’은 우뚝 솟을 ‘외’ 자와 높은 바위 ‘암’ 두 글자가 합쳐진 말로,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바위라는 뜻이다. 1656년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온양군 관아 서남쪽 13리[약 5㎞]에 화산, 즉 지금의 설화산이 있다고 하면서 이 산에 대해 ‘산세외원(山勢巍然) 특관제산(特冠諸山)’이라 하였다. 이는 설화산의 산세가 우뚝 솟아 있어서 주변의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는 우두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설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설화산을 뜻하는 ‘외암’을 마을 이름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외암(隈庵)’이라는 사찰이 화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한자어와 뜻이 다르므로 이를 외암 마을 기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마을 앞에 시흥역이 있어 말을 방목하던 곳이라 ‘외양골’로 부르다가 ‘외암’이 되었다는 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예안이씨(禮安李氏)의 외암리 입향조는 이연(李埏)[?~1546]의 아들 이사종(李嗣宗)[?~1589]으로 알려져 있다. 이사종의 입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립(崔岦)[1539~1612]이 1569년에 쓴 「열승정기(閱勝亭記)」이다.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차천로, 한호와 함께 ‘송도삼절’의 하나로 손꼽혔던 최립은 17세인 1555년 이사종의 딸과 결혼하여 온양의 처가에 자주 출입하였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장인 이사종이 집의 서남쪽 언덕 위에 산과 계곡과 들판의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사위 최립에게 정자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였다. 이사종의 부탁을 받고 최립은 ‘열승정(閱勝亭)’이라 이름하고 「열승정기」를 지었다. 「열승정기」에 따르면, 이사종이 상을 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떠나와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이사종의 온양 정착은 부친 상중(喪中) 이후이다.
열승정의 위치는 현재 아산 건재고택에 걸려 있는 ‘열승정기’ 현판에 의하면, 외암리가 아니라 곡촌(谷村)이다. 이곳은 아산 외암마을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골짜기인데, 마을 사람들은 ‘골말’ 혹은 ‘열승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 후기 읍지에는 온양 관아에서 10리[약 4㎞] 남쪽에 22호 규모의 외암리, 13리 남쪽에 5호 규모의 열승정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승정이 있었던 골말 혹은 열승쟁이에는 이사종의 장인 진한평의 묘소가 남아 있는데, 광복 이전까지 이곳에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2019년 현재 사람이 살지 않으며, 여러 군데에서 집터의 흔적이 발견된다. 최립이 온양의 처가를 왕래할 때, 처가 주변 10리에는 집 한 채 없이 산과 계곡과 들판만 있었다. 열승정은 이사종의 집에서 서남쪽으로 걸어서 가까우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다. 열승정과 이사종의 집은 가깝다. 예안이씨 문중 인사들에 따르면 이사종은 아들 없이 사망한 진한평(陳漢平)의 집과 토지를 물려받았다. 따라서 이사종의 집은 골말의 북서쪽에 집터와 연못 흔적이 있으며, 대나무가 심겨 있는 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사종은 골말에 있는 진한평 집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기록은 이사종의 6세손 외암 이간(李柬)[1677~1727]이 1723년에 쓴 『외암기(巍巖記)』이다. 『외암기』에 따르면 아산 외암마을은 동쪽으로 설화산을 등지고 있고,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냇가의 너럭바위 동쪽 위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외암기』에 묘사된 지형과 위치는 현재의 외암리와 같다. 외암 이간은 예안이씨가 외암동 주인이라고 하여 예안이씨 집성촌임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5대조 이사종이 부친 이연의 묘소를 송악산에 정하고 외암에 별장을 지었고, 높은 곳에 올라 즐기다가 열승정을 지었다. 이사종은 서울에서 물러나 은퇴한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고, 이후 대대로 이사종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파평윤씨, 의령남씨, 평산신씨 등은 예안이씨에게 장가들어 이사종의 외손으로, 외암마을과 주변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이렇듯 외암 이간은 외암마을이 이사종 입향 후 예안이씨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간은 이사종이 외암리에 별장을 지음으로써 외암마을의 입향조가 이사종이며, 이사종의 후손들에 의해 마을이 번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 기록은 외암 이간의 7세손 이용헌이 1906년에 쓴 「선조고문정공부군가장」이다. 이용헌은 이간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이사종의 부친 선릉참봉 이연이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온양 설화산 아래에 정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사종이 부친상을 당한 후 벼슬을 버리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열승정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용헌에 의하면, 이사종의 부친인 이연이 아들과 이연의 후손들이 정착하기 전부터 외암리에 와서 은거하였다는 것이다.
세 개의 기록을 종합하면, 1546년 이연이 사망한 후 이사종이 부친의 묘소를 송악산에 정한 후 온양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들에 의해 외암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수원에 거주하였던 예안이씨가 서울이나 수원을 떠나 온양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46년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 이용헌에 의하면, 이사종의 부친 이연이 일찍부터 벼슬을 싫어하여 온양의 설화산으로 왔다고 한다. 이연이 낙향하였던 이유는 부친 이성간의 정치적 부침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원종공신이 되었던 이성간은 반정공신들이 집단적으로 화를 당하였던 1519년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545년 을사사화 때에도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이성간의 묘소는 후손들 사이에서도 실전(失傳)[묘지 관련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었다. 훈구파에 의해 자기 가족들이 화를 당하게 되자 이연이 벼슬을 버리고 일찍부터 온양의 설화산 아래에 은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사종은 1546년 이전부터 온양과 인연을 맺었다. 온양의 열승정리에 살고 있던 평택진씨 진한평의 사위가 된 이사종은 결혼 후에도 벼슬을 하는 동안에는 서울이나 근무지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546년 부친 이연의 장례를 치른 후 외암리에 별장을 짓고, 그 후 골말에 열승정을 짓고 정착하였다. 그런데 이사종이 평택진씨에 장가들기 위해서는 이미 부친 이연과 진한평의 인연이 있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 이연이 온양의 설화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이웃 마을의 진한평과 친교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사종은 장인 진한평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토대로 외암마을을 예안이씨 집성촌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현재 외암마을은 마을 앞 개천을 지나는 반석교 다리를 건넛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마을 입구에서 큰길을 따라가면 130여m 지점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고, 그곳에서 100여m 남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이 있다. 이곳은 마을의 왼쪽과 앞을 흐르는 개천이 홍수로 범람하더라도 피해를 받지 않을 만큼 높은 언덕 지대와 낮은 지대의 경계 바로 위이다. 따라서 16세기에 마을 입구의 거목과 우물을 중심으로 동쪽의 설화산 방향으로 이사종과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면서 예안이씨 집성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가옥 중 가장 오래된 풍덕댁[풍덕고택]은 마을 우물의 바로 북동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읍지에는 외암리 22호와 열승정리 5호로 각기 다른 마을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1895년의 읍지에는 열승정리가 없어지고 외암리 38호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열승정리와 외암리가 합쳐졌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이후 외암리의 마을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말해 준다.
[외암 마을의 문화재]
현재 아산 외암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적은 이사종의 장인인 진한평의 묘소로 골말에 있다. 이사종이 골말에 지었다고 하는 열승정은 골말의 남동쪽 끝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립이 지은 「열승정기」는 최립의 문집인 『간이집(簡易集)』에 수록되어 있고, 현판은 현재 건재고택에 소장되어 있다. 예안이씨의 입향조인 이연과 이사종의 집이나 집터 위치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외암 이간의 생가도 남아 있지 않은데, 생가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건재고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관련 기록과 마을 주민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건재고택에서 남쪽 길 건너편의 우물 위 언덕배기로 추정하고 있다. 『외암유고(巍巖遺稿)』에 의하면 이간은 1706년 초가집을 짓고 단과 연못을 만들고 대나무와 화초 등을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은 너럭바위와 설화산 사이의 언덕으로, 집의 오른쪽 언덕 끝자락에 너럭바위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간의 생가는 건재고택보다는 더 남쪽에 서남향으로 지은 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외암 이간은 1708년 친구 윤혼[1676~1725]과 함께 강당골에 외암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스승인 권상하[1641~1721]는 외암의 서재에 ‘관선재’라는 편액을 내려 주었다. 관선재는 대원군 때 불교 사찰 강당사로 바뀌어 훼파되지 않고 건물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간 신도비는 마을 입구에 있고, 이간 묘는 마을의 북쪽 송림에 있다. 이간의 문집인 『외암유고』는 1760년 둘째 아들 이이병에 의해 16권 8책으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1994년 『외암유고』 목각판[외암선생문집판각]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3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강당골 강당사의 문천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간의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천거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관직에 진출하였던 예안이씨들이 살던 집들은 벼슬 이름 혹은 근무지 이름을 따서 택호(宅號)를 정하였다. 풍덕댁은 풍덕군수 이택[1721~1775], 송화댁은 송화군수 이장현[1779~1841], 병사 혹은 신창댁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병사 이용현[1783~1865], 옥천댁은 옥천군수 이용대[1820~?], 교수댁은 성균관 교수 이중렬[1859~1891], 고양댁은 고양군수 이상덕, 영암댁은 영암군수 이상익[1848~1897]이 살던 주택이다. 영암댁은 ‘건재고택’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이상익의 아들 건재 이욱렬[1874~1960]의 호를 딴 것이다. 참판댁은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았던 집이다. 외암 이간의 종가에는 이간의 불천위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으며, 건재고택, 교수댁, 참판댁, 감찰댁에도 사당이 남아 있다. 열녀 안동권씨 정려는 이정렬의 맏아들 이용덕에게 시집와서 남편이 일찍 사망한 뒤에도 수절한 여인의 정절을 기리는 건물이다.
아산 외암마을 참판댁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궁내부 특진관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의 하사금으로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이정렬은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여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 현재 참판댁에는 영친왕이 9세에 ‘퇴호거사(退湖居士)’라고 쓴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참판댁의 종부는 이정렬의 조부 이원집[1825~1879]이 왕실의 제조법을 배워 집안에 전수한 연엽주를 빚어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1호[아산연엽주]로 지정받았다. 아산 건재고택은 마을의 중심부에 있으며, 사랑채 앞에 나무, 화초, 바위, 연못, 꽃, 석물들로 꾸민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안채의 후원에 정원을 꾸미는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이다. 이는 건재 이욱렬이 개축하면서 건물 배치를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사랑채에는 당호인 ‘건재장’ 현판과 함께 ‘외암서사’, ‘열승정기’, 추사체의 ‘무량수각’, ‘설아장’ 등의 현판이 걸려 있고, 유학자로서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명언을 적은 주련들이 기둥에 걸려 있다. 아산 건재고택은 1998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33호로 지정되었다.
[외암 민속 마을의 가치]
아산 외암마을은 조선시대 충청도의 전형적인 양반 마을이다. 반가와 민가가 한데 어우러져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남향의 집들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로 자리 잡은 마을이다. 동쪽의 설화산을 등지고 마을 남쪽으로 시냇물이 감싸고 돌면서 서쪽 앞쪽에서 강당골에서 내려온 물과 합해져 마을 오른쪽 북쪽으로 흘러가 곡교천에 이르게 된다. 마을 입구 시내의 너럭바위를 지나 설화산 쪽의 언덕 위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의 왼쪽, 즉 북쪽으로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 있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 즉 북쪽은 산이 없어 넓게 트여 있는데, 설화산 쪽에서 서쪽으로 소나무를 심어서 우백호의 기운을 보완하면서 겨울의 추운 북풍을 막았다.
돌이 많은 들판이었는데, 집터를 다지고 논밭을 만들면서 나온 돌을 활용하여 담장을 쌓고 길을 냈다. 화산 또는 설화산의 화기를 누르고 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설화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끌어 마을의 집집마다 물길을 만들었다. 이 물을 이용하여 정원의 풀과 나무를 가꾸어 집과 마을이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양반의 기와집과 평민의 초가집이 나지막한 담을 경계로 한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반가의 건물은 땅의 습기를 막기 위해 무릎 높이 정도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어 크기에서 민가와 차이가 있으나, 높이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외암마을의 환경과 생활은 외암 이간을 대표로 하는 예안이씨 유교문화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유교는 자연의 도리에 따르는 것을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한다. 외암 이간은 이러한 뜻을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는 주장으로 심화시켰으며, 소박한 집에 나무, 화초, 연못이 있는 정원을 가꾸어 자연과 일체가 된 집에서 천도와 인륜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외암의 생가는 현존하지 않지만, 자연과의 조화로운 주거문화를 추구하는 선비의 정신과 문화는 마을의 고택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주민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일본의 식민 지배와 6·25전쟁의 풍파 속에서도 마을의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지켜냈다.
2000년 1월 아산 외암마을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외암민속마을보존회를 만들어 전통의 보존과 마을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산시도 외암민속마을 관리사무소를 설치하여 마을 주민과 함께 민속마을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 아산 외암마을은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윷놀이, 장승제와 목신제, 단오, 백중, 동지 등 전통적인 세시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외암 이간 선생에 대한 불천위제사, 시제, 상제례 등을 지낼 때도 유교적 제의 전통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또한 예안이씨 문중은 2005년 외암사상연구소를 만들어 『외암유고』를 번역하고 외암 이간의 사상과 아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마을이 가진 역사적·문화적 가치, 마을 주민들의 전통 보존과 문화 발전에 대한 열의, 문화재청과 아산시의 행정적·재정적 지원 등으로 아산 외암마을은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