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구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667
한자 金叙九
영어공식명칭 Kim Seogu
이칭/별칭 맹주(孟疇),성주(聖疇)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25년연표보기 - 김서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61년 - 김서구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63년 - 김서구 대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64년 - 김서구 사간원 정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79년 - 김서구 경성판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80년 - 김서구 해남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84년 - 김서구 사간원 헌납 제수
부임|활동지 해남 - 전라남도 해남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산(豐山)
대표 관직 헌납(獻納)

[정의]

조선 후기 해남현감을 지낸 문신.

[개설]

김서구(金叙九)[1725~?]는 1780년 2월부터 1781년 6월까지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있으면서 남천교를 중수하였다.

[가계]

김서구의 자는 맹주(孟疇) 또는 성주(聖疇),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시하(金時夏), 할아버지는 김정화(金鼎和)이다. 친아버지는 김집(金𠍱)이며 김휴(金休)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활동 사항]

김서구는 1761년(영조 37) 정시(庭試)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하였다. 1763년 대교(待敎)를 거쳐 이듬해 사간원 정언(正言), 1779년에는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역임하였다. 1780년 해남현감으로 부임한 김서구는 재임 중 수해로 파괴된 석교를 중수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남천교를 중수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였”으며, 다리를 만들 때에 김서구가 “평복 차림으로 날마다 공사장에 나와 앉아서 친히 공사를 감독”하였다고 적었다. 또한 정약용은 김서구에 대해서 “언제나 검소함을 좋아하여 거친 베 도포 위에 갖옷을 걸치고” 다녔으며, “백성들에게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김서구와 관련해서 우슬재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해남현은 토호들의 세가 강해서 현감이 기를 펴지 못해 다들 해남현감이 되기를 꺼렸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김서구는 해남현감으로 부임한 후 금강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청룡·백호·주작·현무의 형국 탓에 관이 토호들의 기세에 눌린다는 것을 알아채고 우슬재를 석 자 세 치씩 깎아 내자 그제야 토호들의 세력이 꺾였다고 한다.

해남현감을 지낸 이후 김서구는 1784년(정조 8)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