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642
한자 李懿信
영어공식명칭 Lee Uisi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세기 중후반 - 이의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이의신 교하 천도설 주장
활동 시기/일시 1614년 - 이의신 지리학교수에서 파직되어 낙향
출생지 전라도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지도보기
성격 풍수가
성별
본관 원주(原州)
대표 경력 지리학교수

[정의]

조선 후기 해남 출신의 풍수가.

[개설]

이의신(李懿信)[?~?]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풍수가였다.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 태생으로 관련 설화가 많이 전한다. 선조 때부터 왕가의 묏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선조는 이의신에게 벼슬을 내려 자신의 옆에 붙잡아 두었다. 광해군 때는 교하 천도설로 조정을 발칵 뒤집기도 하였다.

[가계]

이의신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아버지는 이원린이며, 부인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속설에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고모부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활동 사항]

이의신은 1612년(광해군 4) 임진왜란과 거듭되는 역모, 신하들의 분당과 다툼 등이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한 결과라면서 길지(吉地)인 교하현(交河縣)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려 광해군의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예조판서 이정귀(李廷龜)와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교하로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신하들은 이의신이 요망한 말로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며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광해군이 거절하여 이의신은 처벌받지 않았다. 1614년 4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의신은 지리학교수에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관련 설화]

이의신은 어렸을 때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에 있는 서당에 다녔다. 이때 어여쁜 처녀가 밤마다 나타나 이의신을 유혹하며 자신의 입속에 든 구슬을 이의신의 입에 넣어 주곤 했다. 날로 여위어 가는 이의신을 보면서 서당 훈장은 그 처녀는 백 년 묵은 여우가 분명하니 구슬을 입에 넣어 주거든 꼭 물고 서당으로 도망쳐 오라고 했다. 다음날 스승의 말대로 구슬을 물고 서당으로 도망쳐 오던 의신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구슬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를 본 훈장은 이의신에게 넘어지면서 뭘 봤느냐 하고 물으니 이의신은 땅을 봤다고 하였다. 훈장은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보았으면 하늘의 섭리와 땅의 이치를 아는 당대 최고의 인물이 되었을 텐데 땅을 보았으니 지관으로 머물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윤선도 무덤에 관한 설화도 전하는데, 이의신이 자신의 묏자리로 잡아 놓았던 터를 윤선도가 꾀를 써서 빼앗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로 인해 해남윤씨 집안이 지금까지 번창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에 따르면 서자로 태어난 이의신은 조선에서 자신의 큰 뜻을 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명나라로 망명하여 주부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그때 이의신이 거쳐 간 인연으로 중국 남쪽에 있는 섬을 ‘해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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