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93
한자 美黃寺事蹟碑
영어공식명칭 Mihwangsa Sajeokbi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서정리 산24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호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92년연표보기 - 미황사 사적비 건립
현 소재지 미황사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서정리 산247]지도보기
성격 기념비
양식 석비
관련 인물 민암|이우
재질
크기(높이, 너비, 두께) 370㎝[전체 높이]|290㎝[비신 높이]|129㎝[비신 폭]|33㎝[비신 두께]
소유자 미황사
관리자 미황사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있는 달마산 미황사 창건과 중수에 관한 역사가 기록된 사적비.

[개설]

미황사 사적비(美黃寺事蹟碑)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중턱에 있는 미황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비석이다.

[건립 경위]

미황사 창건과 중수에 관한 역사의 자취를 기록하고자 1692년(숙종 18) 9월 두인(杜忍)의 주관 아래 비석을 건립하였다.

[위치]

미황사달마산 중턱에 있다. 미황사의 남쪽 암자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 옆에 부도군이 있다. 부도군 안에 승려의 탑비와 행적비가 5기 있고, 건물지 축대 바로 아래에 사적비가 있다. 현재는 터를 돋아 달마선원을 건립하고 마당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상태이다.

[형태]

미황사 사적비는 거북 받침돌[龜趺]과 비 몸돌[碑身], 비의 머릿돌[螭首]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비의 상태가 마모가 심해 현재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후면은 전면보다 연호 이외에 판독이 대부분 어렵다. 비좌는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비 몸돌이 들어가서 버틸 수 있게 파내서 세웠다. 비좌를 제외한 전체 높이는 370㎝이고, 비신은 높이 290㎝, 폭 129㎝. 두께 33㎝이다. 본문을 새긴 앞면과 음기를 새긴 뒷면은 잘 다듬었지만 글씨가 없는 좌우 측면은 매우 거칠다. 비문의 글자 지름은 전제 15㎝, 본문 3.5~4㎝, 음기 2.5~3㎝이다. 비 머릿돌은 장방형으로 구름무늬를 새기고 위에 용을 조각하여 팔작지붕의 용마루와 합각마루처럼 표현하였다. 용마루 양 끝에 밖으로 향한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나 오른쪽은 파손되었다. 용마루에 조각된 용의 몸체 아래에 구멍을 뚫어 입체감을 더하였다. 이와 같은 옥개석은 1688년 세운 해남 명량대첩비(海南鳴梁大捷碑)에서 볼 수 있다.

[금석문]

미황사 사적비는 앞면 윗부분에 ‘미황사비명(美黃寺碑銘)’이라 전제(篆題)를 쓰고 비제(碑題)는 ‘유명조선국전라도영암군달마산미황사사적비명병서(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達摩山美黃寺事績碑銘幷序)’라 하였다. 비문은 민암(閔黯)[1636~1693]이 짓고 본문과 전서를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가 썼다.

본문 끝에 비의 건립 시기를 ‘숭식기원후육십오년임신구월일립비두인숭식기원후육십오년임신구월일립비두인(崇植紀元後六十五年壬申九月日立碑杜忍崇植紀元後六十五年壬申九月日立碑杜忍)’이라 하여 1692년 9월 두인의 주관 아래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음기 끝에는 ‘강희삼십일년임신오월일흘공서진□서(康熙三十一年壬申五月日訖功瑞眞□書)’라 하여 1692년 5월에 공역을 끝내고 서진(瑞眞)이 음기의 글씨를 썼음을 밝혔다. 음기에서 표현한 공역을 마쳤다는 것은 비문의 각자와 옥개석의 제작을 완료하고 비를 세우는 일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공역을 마친 4개월 후에 비로소 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연호는 명나라의 숭정(崇禎)과 청나라의 강희(康熙)를 혼용하고 있다. 비제를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으로 시작하고 건립 시기를 명나라의 연호로 사용하였으나 음기에서는 공역을 마친 날을 청나라의 연호로 기록하였다. 명[1368~1644]은 비가 세워지던 해인 1692년에는 이미 멸망한 지 한참 지난 때이다. 또 우리나라에서 명이 멸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숭정 연호를 사용하였음은 많은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석문의 내용은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靈巖郡)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 시적비명(事迹碑銘)과 서(序) 숭정대부(崇政大夫)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겸 지경연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知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민암(閔黯) 장유(長孺)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관부도총관(五衛都摠官府都摠管) 이우(李俁) 쓰고 아울러 전액을 씀 숭정기원후 65년 임신(숙종 18, 1692) 9월 일 비를 세움. 두인(杜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황]

미황사 사적비는 1995년경 비 대좌가 흙에 덮여서 자연석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이후 뒤쪽으로 달마선원을 건립하면서 덮인 주변 흙을 걷어 내니 자연석 비좌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황사 사적비는 비지정 문화재로 별다른 보호각은 없다. 관리는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에서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미황사 사적비미황사의 역사를 기록한 금석문 자료로 의미가 깊다. 또한 하나의 금석문에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섞어서 사용한 것은 사례가 드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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