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271
한자 長春橋
영어공식명칭 Jangchunkyo Brid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시대 조선
집필자 변남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1940년 11월 - 장춘교 심진교 중건
변천 시기/일시 1968년 11월 - 장춘교 피안교 중건
변천 시기/일시 1982년 04월 15일 - 장춘교 제1장춘교 중건
변천 시기/일시 1982년 04월 15일 - 장춘교 제4장춘교 중건
변천 시기/일시 1984년 3월 - 장춘교 망화교 중건
변천 시기/일시 1986년 02월 28일 - 장춘교 운송교 중건
변천 시기/일시 1992년 11월 - 장춘교 반야교 중건
비정 지역 장춘교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 경내지도보기
성격 고지명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 냇가에 건설된 다리들.

[명칭 유래]

대흥사에 이르기 전에 장춘 자연마을의 인근에서 냇가를 여러 차례 건너야 한다. 장춘마을 냇가에 다리가 건설된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형성 및 변천]

대흥사 관내 장춘마을 인근에 건설된 여러 석교를 말한다. 기록에 따른 장춘교(長春橋)의 시작은 피안교이며, 중건 기록에 의하면 1750년 무렵에 석교로 건설되었다. 이외 대부분의 다리는 징검다리로 냇가를 건넜다. 현재 심진교는 1940년에 중건되었고, 1968년에 피안교가 중건되었고, 이외 다리는 1980년대 초반 도로를 아스콘 포장으로 확장하면서 대부분 증축 완공되었다.

대흥사 관내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냇가가 있는데 여기에 시기를 달리하여 석교가 건설되었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리지에서는 대흥사 관내에서 다리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에는 징검다리나 초목으로 만들어 이용하였으나 홍수 시 파괴되면서 튼튼한 석교로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에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 다리의 기록으로 보면 대웅전 앞의 심진교가 1940년에 최초로 건설되었으며, 이어 1968년에 피안교가 건설된 이후에 1980년대에 모두 준공되었다. 그 이름과 건설 시기는 다음과 같다. 순서는 현 매표소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순이다. ① 제1장춘교는 대흥사 입구 앞에 있다. 옛 이름은 현무교(玄武橋)이며, 1982년 4년 15일 재건되었다. ② 제2장춘교는 이원교로 배고픈 다리라고 한다. 급회전 길에 있어 사고가 잦다. ③ 운송교(雲松橋)는 대흥사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있으며, 아스콘포장 아래 옛 석축 다리가 보인다. 1986년 2월 28일 준공되었다. ④ 제4장춘교는 홍류교로 장춘마을 앞을 지난다. 1925년에 간행된 『해남군지』에 “장춘교 3칸이며, 군에서 30리[약 11.78㎞]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제4장춘교를 말하는 듯하다. 현 장춘교는 1982년 4월 15일 준공되었다.⑤ 망화교(網花橋)는 마전밭에서 유선여관으로 연결되는 다리이다. 1984년 3월 준공되었다. ⑥ 피안교(彼岸橋)는 유선여관에서 대흥사로 연결되는 다리이다. 옛 이름은 청홍교 또 사자교라 칭했다. 1750년 무렵에 준공한 다리가 홍수로 파괴되어 목교로 개축되어 왕래하던 중 현존 다리로 1968년 11월[불기 2995년 무신 11월] 중건되었다. ⑦ 반야교(般若橋)는 운학교(雲鶴橋) 또는 쌍왕교라고도 하였으며, 부도전 앞에 있는 다리로 1992년 11월 준공되었다. ⑧ 심진교(尋眞橋)는 대흥사 남원에서 북원으로 연결된 다리이다. 현 다리는 1940년 11월 준공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대흥사 관내 장춘마을 인근에 건설되었다.

[관련 기록]

피안교 중건 창건비에 “옛날엔 이 다리를 사자교라 이름했다. 부처님을 모신 이 도량을 지킨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오랜 풍설로 소멸되자 지금으로부터 220년 전에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를 놓아 그 배경의 운치를 살려 만폭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다. 허나 이마저 비에 떠내려가 간신히 나무를 얽어 사람의 내왕을 도왔는데, 해마다 홍수에 유실되어 그 불편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 1967년(불기 2994) 10월 31일 운정 김종필 박사가 이 절에 들려 이 딱한에 이르리란 주지 양청우(楊聽雨)선사의 풀이에 의결을 모아 피안교라 하였으며, 김 박사가 스스로 붓을 들어 빛을 더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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