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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627
한자 吳達運
영어공식명칭 Oh Dalun
이칭/별칭 백통(伯通),해금(海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윤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0년연표보기 - 오달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0년경 - 오달운 향시(鄕試)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40년 - 오달운 과거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46년 - 오달운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 역임
몰년 시기/일시 1748년 7월 1일연표보기 - 오달운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오수도 - 전라북도 남원시
묘소|단소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대진리 -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대진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용지사 -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동복(同福)
대표 관직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

[정의]

조선 후기 해남 출신의 문신이자 실학자.

[개설]

오달운(吳達運)[1700~1748]은 18세기 초에 진보적인 사상을 품고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한 실학의 선각자이다.

[가계]

오달운의 자는 백통(伯通), 호는 해금(海錦),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지금의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오명승(吳名勝)이며, 할아버지는 오필주(吳弼周)이다. 어머니는 최남극(崔南極)의 딸 풍천최씨(豊川崔氏)이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활동 사항]

1700년(숙종 26) 현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에서 태어난 오달운은 열 살 무렵 영암에 은거하던 김순형을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오달운은 약관의 나이에 유가의 경전을 섭렵하고 향시(鄕試)에 장원급제하였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과거 시제 자체가 당시 학문 풍토를 망쳐 놓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음양오행, 병서, 산경 등 실용학에 관심을 두고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열어 갔다.

오달운은 나주로 이사한 뒤 금성산 남쪽의 영산강변에 서당을 짓고 10년간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제자들의 권유로 1740년(영조 16) 과거에 응시해 생원시, 진사시는 물론이고 대과 회시(會試)에서도 장원급제하였다. 1746년(영조 22)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제수되어 전라도 남원으로 부임한 오달운은 관직에는 직위의 고하가 없다면서 묵은 폐해를 시정하고 우마를 철저히 관리하였으며 부하들을 사랑하여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1747년(영조 23) 6월 오달운은 도회의 시험관으로 나갔다가 더위에 열병이 생기고 평소의 지병이 악화되어 1748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오달운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해금집(海錦集)』[1828]과 실학서 『상제상서(上帝相書)』, 『종학도설(從學圖說)』, 『인극도설(人極圖說)』, 『공도회의(公都會議)』, 『가주전변부의(加鑄錢便否議)』, 『왕패략호남책(王覇略湖南策)』 등이 있다. 『공도회의』에서는 과거제의 시행상 모순과 그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였는데, 특히 농번기인 6월에 과거를 실시함으로써 갖가지 폐해가 생긴다며 그 시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왕패략호남책』에서는 사회개혁 포부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9개 조목으로 되어 있는 「왕패략」에는 교육, 군사, 사회, 토지에 대한 개혁 의지가 드러나 있다. 「호남책」에서는 18세기 초 호남지방의 민정 실태를 소상하게 밝히고 여러모로 행정상의 작폐와 모순이 가장 혹심함을 지적하였다.

[묘소]

오달운의 묘소는 해남군 산이면 대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해남군 계곡면 용지리에 오달운을 배향한 용지사(龍池祠)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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