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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69
한자 海珍郡
영어공식명칭 Haejingu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윤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 시기/일시 1409년연표보기 - 해진군 개설
폐지 시기/일시 1437년연표보기 - 해진군 폐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12년 - 해진군 치소를 옥산으로 이전

[정의]

1409년부터 1437년까지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이 통합되면서 설치한 지방 행정구역.

[개설]

해남현(海南縣)은 중앙정부의 공도정책에 의해 1409년(태종 9)에 진도군과 합쳐 해진군(海珍郡)이 되며, 1412년(태종 12)에는 치소를 옥산[지금의 삼산면 상가리 계동마을]으로 옮긴다. 이는 고려 말과 조선초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인한 공도정책(空島政策)에 따라 바닷가와 인접한 고현 치소에서 좀 더 내륙 쪽인 옥산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진도의 읍치를 내륙으로 옮긴 것이 군현 사정과 주민들의 불편함을 가져오자 1437년(세종 19)에는 다시 본래의 해남과 진도로 복귀하게 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전기 왜구의 잦은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앙정부는 해안가와 섬 지역을 비우고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진도의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면서 해남과 진도를 통합하기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7권 전라도 해남현]에 보면 해남현은 1409년에 진도군과 합쳐 해진군이 되었다. 이는 태종 대에 진행된 군현 병합 조치에 따라 진도와 해남을 합친 것으로, 고을 이름은 각각 한 글자씩 따서 해진이라고 하였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37권 전라도 해남현]에 “본래 백제의 새금현(塞琴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침명(浸溟)[투빈(投濱)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고치어 양무군(陽武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영암군에 예속시켰다. 본조 태종 9년에 진도현에 합쳐 해진군으로 되었으며, 태종 12년에 고을의 치소(治所)를 영암에 딸린 현 옥산(玉山) 땅에 옮기었다가 세종 19년에 해남과 진도를 다시 분리시켜 해남현으로 삼고 현감을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당시 해남과 진도의 합군과 분군의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해남현은 1409년에 진도군과 합쳐 해진군(海珍郡)이 되었다. 1412년에는 치소를 영암 땅 옥산[당시는 영암]으로 옮겼다가, 그 뒤 또 한 차례 치소를 옮겨야 했는데, 즉 진도의 읍치를 내륙으로 옮긴 것이 군현 사정과 주민들의 불편함을 가져오자 1437년 다시 본래의 해남과 진도로 복귀하게 된다.

1409년 당시는 아직도 변방과 해안 지방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행정의 중심 치소도 별도로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해진군은 1409년 확대된 영역을 다스리는 관부로서 중심 치소를 지금의 삼산면 평활리 나범마을[구 녹산역지]에 정하고 새로 성을 축조하여 옮기게 된다. 1412년에는 다시 해진군의 치소를 영암 땅 옥산현에 옮겨 영읍(營邑)하는데, 당시 치소는 지금의 삼산면 상가리 계동마을 성뫼산 토성에 해당한다.

[의의와 평가]

해남이 진도와 합하여 해진군이 된 것은 조선 초 왜구의 잦은 침략에 따른 중앙정부의 불가피한 정책이었다. 섬 지역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군현 사정과 주민들의 불편함을 가져오자 1437년에는 다시 본래의 해남과 진도로 복귀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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