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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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漁松里倉浦山神祭 |
이칭/별칭 | 어송3리 산신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3리 |
집필자 | 강성복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3리 창개마을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어송리 창개 산신제는 음력 1월 초에 인일(寅日)[범날, 호랑이날]을 택하여 팔봉산 상봉 밑의 산제당에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위하여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창개마을은 동북쪽으로는 팔봉산을 등지고, 마을 앞으로는 가로림만의 가장 깊숙한 포구에 자리한다. 제관은 부정이 없는 깨끗한 마을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정결한 다섯 명의 주민으로 선정한다. 제의 비용은 집집마다 갹출하여 충당하고 있으며 제수는 메, 떡, 삼색실과, 포, 술 등이다.
[연원 및 변천]
어송리 창개 산신제의 유래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 마을이 매우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촌락임을 고려하면 산신제의 연원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마을의 ‘창개[倉浦]’라는 지명은 고려 전기[정종 때]에 세곡(稅穀)의 안전한 운반을 위하여 전국에 13창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에 영풍창(永豊倉)이 자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영풍창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안흥량(安興梁)[난행량(難行梁)]의 험로를 피하기 위하여 적치하였다가 개경으로 보냈는데, 당시 군수급에 해당하는 판관(判官)의 직위를 가진 벼슬아치가 창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곳에 주재하였다.
따라서 그 밑에는 많은 아전과 뱃사람들이 배치되었던 곳으로, 조선 시대 영풍창면이라는 면명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이런 연유로 조선 시대 세곡선의 안전 운항을 기원하는 제의가 동제로 정착된 것이 어송리 창개 산신제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은 마을 동북쪽에 위치한 팔봉산 8부 능선에 자리한다. 당집이나 특별히 봉안한 신체는 없고 단지 ‘산제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 밑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를 지낸다.
[절차]
날이 저물면 제관은 제수를 준비하여 산제당에 오른다. 제물이 진설되면 유교식 절차에 따라 산신제를 지낸다. 그 순서는 분향(焚香)→ 강신(降神)→ 초헌(初獻)→ 독축(讀祝)→ 아헌(亞獻)→ 종헌(終獻)→ 소지(燒紙)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산신제의 마지막 절차인 소지는 팔봉산 산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대동 소지를 불사른 다음 가가호호 세대주의 소지를 한 장씩 올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