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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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存性 |
영어음역 | Jo Jonseong |
이칭/별칭 | 수초(守初),용호(龍湖),정곡(鼎谷),소민(昭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후기 서산군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 할아버지는 증판서 조연손(趙連孫)이고 아버지는 조준수(趙俊秀)다. 부인은 용인 이씨로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둘째 아들은 병조판서를 지낸 조계원(趙啓遠)이다. 조존성은 증좌찬성 조남(趙擥)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조존성(趙存性)[1554~?]은 성혼(成渾)·박지화(朴枝華)의 문하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이항복(李恒福)·신경보(辛慶普) 등과 교유하였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교에 승진하였다가 모함으로 파면당했다. 고향에 머물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대교에 복직된 후, 전적에 승진되었다.
1593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에서 명군을 철수하려는 것을 중지시키고, 초황(哨黃)[화약 연료] 수만 근을 가지고 와 그 공으로 직강에 승진되었다. 1597년에는 어사가 되어 군량미 운반을 맡았는데, 그 양이 40만 섬을 넘었다. 1601년 강화부사에 이어 호남어사·충주목사·단산군수를 역임하였다. 서산군수는 1607년(선조 40)에 임명되었고, 2년 뒤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체임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금의 생모 추존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형조·호조의 참판,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검찰사가 되어 왕을 공주로 모셨고 난이 평정된 뒤 지의금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 강원도관찰사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분조(分朝)의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란하였다가 돌아와 이듬해 병사하였다. 조존성은 호전적인 성격이었으며 이재(理財)에 밝고 사리판단이 빨랐던 것으로 평가된다. 관리의 부정에는 엄격하였고, 일반 백성의 죄는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 처리하였다. 향임 출신인 유흡(柳洽)의 효행에 대해 들었을 때는 예의를 갖추어 공경심을 표하고, 그의 효행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정문을 세우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파직되어 고향인 용인에서 지낼 때 지은 연시조 「호아곡(呼兒曲)」이 『해동가요(海東歌謠)』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한다. 초장 첫 구가 ‘아희야’로 시작되어 「호아곡」으로 불리는 이 연시조는 「서산채미(西山採薇)」·「동간관어(東澗觀魚)」·「남묘궁경(南畝躬耕)」·「북곽취귀(北郭醉歸)」 등 4수로 이루어져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이곳은 양주 조씨 묘역으로 정경부인 용인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새로 만든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오른쪽에 묘표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30년(인조 8) 소민(昭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