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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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赫然 |
영어음역 | Yu Hyeokyeon |
이칭/별칭 | 회이(晦爾),야당(野堂),무민(武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오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출생 시기/일시 | 1616년 - 유혁연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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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무과 출신자로는 이례적으로 좌승지 발탁 |
활동 시기/일시 | 1656년 -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어영대장으로 승서 |
활동 시기/일시 | 1669년 - 탄핵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경기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이배 |
몰년 시기/일시 | 1680년 - 유혁연 졸 |
추모 시기/일시 | 1689년 - 기사환국 때 영의정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96년 -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받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1년 - 『야당유고(野堂遺稿)』-유혁연 9세손 유석조 수집, 이철규 교정, 간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80년 - 「경신전말(庚申顚末)」『야당유고(野堂遺稿)』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오학리 |
유배|이배지 | 유배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유배|이배지 | 이배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
묘소|단소 | 유혁연의 묘 - 대전광역시 서구 당고개길 65-1[평촌동]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진주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회이(晦爾), 호는 야당(野堂). 할아버지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명랑해전에서 공을 세운 충경공 유형(柳珩)이고, 아버지는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진무이등공신 진양군 유효걸(柳孝傑)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로,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조부 역시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운 진무이등공신 남이흥(南以興)이다.
[활동 사항]
유혁연(柳赫然)[1616~1680]은 대대로 출중한 무신 집안에서 자란 인물로 청소년 시절을 서산시 해미면 오학리에서 지냈다. 어릴 때는 외갓집이던 남이흥 장군의 집에서 지냈는데,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덕산현감, 선천부사,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군병과 군기를 잘 정비하여 효종으로부터 내구마(內廏馬)를 하사받았다. 유혁연은 이 일로 효종의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효종은 당시 북벌을 염두에 두고 군비의 확충에 골몰하던 때였다. 이에 이완(李浣)과 유혁연을 중용하게 된 것이다. 1654년(효종 5)에는 무과 출신자로는 이례적으로 국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는 좌승지에 발탁되었고, 이후에도 경기수사, 충청병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유혁연은 1656년(효종 7) 10월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곧이어 어영대장으로 승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당쟁이 서서히 격화되던 시기로 유혁연은 남인 계열로 지목되어,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서인의 중심인 김수항(金壽恒) 등의 문신들로부터 ‘국왕에 대한 언사가 난잡하고 대신들에 대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한직에 머무르게 된 일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한 후에는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1669년(현종 10) 3월 현종이 온양온천으로 요양 차 행행(行幸)할 때에는 어영대장이었던 그가 호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문신들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자 유혁연도 경상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으로 이배되었다. 당시 서인의 주요 인물인 김수항 조차도 유혁연이 죄가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1680년 9월 향년 65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학문과 저술]
현종 때 훈련도감병 운영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자, 유혁연이 호(戶)·보(保)로 편제되는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여 급료병의 수를 줄임으로써 재정의 곤란을 덜어내는 한편 군액(軍額)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혁연은 무예가 뛰어나기도 하였지만 글씨와 죽화(竹畵)는 물론 시문에도 능하였다. 저술로 시문집인 『야당유고(野堂遺稿)』가 전하는데, 1901년(고종 38) 유혁연의 9세손인 유석조(柳錫祚)가 수집하고 이철규(李哲珪)가 교정, 간행하였다. 총 4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되어 있는데 시(詩), 기(記), 연기략(年紀略), 행장(行狀), 「경신전말(庚申顚末)」 등이 실려 있다. 「경신전말」은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유배되어 사사된 경위를 서술한 글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제주에서 사사되어 한강 변 광진(廣津)에 가매장되었다가 10년 뒤인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신원된 뒤 대전광역시 서구 당고개길 65-1번지[평촌동]에 묻혔다. 1924년에는 신도비를 세웠으며, 묘지의 비문은 이의국(李義國)이 짓고 9세손인 군수 유석우가 글씨를 쓴 것이다. 유혁연의 묘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신원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후 1796년(정조 20)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