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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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初期國家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이현숙 |
[정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이전의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개설]
삼국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이전의 시기에 대해 고고학계에서는 ‘원삼국 시대’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원삼국 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실제로 한강 이남의 유적·유물에 한정되었다. 또한 역사 발전 단계상 큰 차이가 있는 고구려와 삼한의 문제, 원삼국 시기를 과연 문화적 획기로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따라서 문헌사학계에서는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 원삼국 시대라는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 속에서 학계 일각에서는 ‘철기 시대’, ‘삼한 시대’, ‘삼국 시대 전기’, 그리고 ‘초기 국가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고고학적인 문화상으로는 청동기의 소멸, 철 생산의 성행, 도작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타날문토기[김해토기]의 출현을 특징으로 보았다. 이러한 변화는 낙랑군을 통한 중국 한문화(漢文化)의 자극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요 유적]
서산 지역은 일찍이 마한의 54국 중 치리국국(致利鞠國)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한 초기 국가 시대의 문화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서산 지역에 대한 유적 조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초기 국가 시대의 문화상이 조금씩 확인되고 있다. 이 시기 유적으로는 주거지, 패총, 가마 등의 생활 유적과 주구토광묘, 토광묘[목관·목곽], 옹관묘 등의 묘제 관련 유적이 전해지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문화상을 살피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자료 부족 문제는 앞으로 계속되는 발굴 조사를 통해 점차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서산 지역에서 확인된 초기 국가 시대 유적은 백제 시대와 구분되는 문화의 획기를 상정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이다. 즉 주거지와 분묘 문화상에 있어서 계기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서산 지역의 분묘 유적은 1969년 조사된 대로리 명지 고분을 통해 처음 알려졌으며 이후 여미리 유적, 여미리 방죽골 고분군, 기지리 유적, 부장리 유적, 언암리 유적, 예천동 고분군 등이 조사되었다.
지금까지 서산 지역에서 확인된 초기 국가 시대의 분묘 형태는 대부분이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명지마을 고분군에서 조사된 분구묘이다. 분구묘는 최근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묘제이다. 저구릉성 지역을 선호하여 지상에 분구를 조성하고, 분구 주위로는 분구 조성으로 인해 형성된 주구가 갖추어져 있다. 매장 시설은 분구 내에 조성되고 목관 또는 옹관이 이용되었다. 이는 중부 내륙 지역을 포함한 서울 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묘제 양상이다. 이러한 분구묘는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호남 지역까지 넓게 분포하는 특징을 보인다.
생활 유적은 기지리 유적, 부장리 유적, 언암리 유적, 무장리 가마터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 유적에서는 분묘와 함께 확인되고 있다. 주로 주거지와 수혈유구가 중심을 이루며 무장리 가마터에서는 탄요 1기가 조사되었다. 수혈 주거지는 일반적으로 평면 형태가 방형 또는 장방형 계통이 확인되며 주거지 내부 모서리 부근에 주공이 설치되는 4주식 주거지도 확인되고 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수혈유구도 함께 확인되고 있어, 앞으로 초기 국가 시대-백제 시대 서산 지역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