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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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茂朱-純粹文學批評家金煥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영미 |
위치 | 김환태 묘소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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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김환태 문학관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한풍루로 346[당산리 918-3]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무주 출신 김환태의 비평가적 면모.
[개설]
김환태(金煥泰)[1909~1944]는 전라북도 무주에서 무주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고씨(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주에서 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전주 고등 보통학교로 진학하였으며, 2학년 재학 중에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항거하며 동맹 휴학을 선도하였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학교 당국이 징계 조치를 해제하지 않자, 그는 서울의 보성 고등 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1928년에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31년에 수료하였다. 당시 교토의 고풍스럽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평생 동안의 문우이자 존경하는 선배였던 정지용(鄭芝溶)을 만나 문학적 교감을 나누었다. 1934년 규슈 대학[九州大學] 영문학과 졸업 시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로 논문의 주제를 정하면서 비평가로 입신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환태는 황해도(黃海道) 재령의 명신 중학교와 서울의 무학 여자 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6년은 김환태의 생애에서 기억될 만한 해인데, 3월에 김기림(金起林), 정지용, 이태준(李泰俊), 이상(李箱) 등과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든든한 문학적 동지들을 규합하게 되었다. 평소에 안창호(安昌浩)를 따랐던 그는 도산 사건과 관련하여 동대문 경찰서에 한 달 동안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해 6월에는 박용철(朴龍喆)의 누이 박봉자와 혼례를 올리고 평생의 반려로 삼았다. 이처럼 이 해에 김환태는 문학적 동지와 생의 동반자를 한꺼번에 얻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일제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문단 상황이 악화되고, 자신을 괴롭히던 폐결핵이 심해지자 김환태는 평필을 거두고 낙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위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1944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무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비평 활동을 전개한 기간은 불과 6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카프의 집단 비평이 세력을 부리던 시절에 개인의 심미성을 강조하며 순수문학을 옹호하였던 김환태의 비평 정신은 지금도 평단에 두루 남아 있다.
[나는 예술 지상주의자]
김환태는 영문학을 전공하는 동안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당초의 결심을 뒤로하고 비평가로서의 소양을 다졌다. 그가 대학에서 사숙한 비평가들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매튜 아놀드, 월터 페이터(Walter Pater) 등의 영국 비평가였다. 이들이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강조하는 부류라는 점에서 김환태의 비평적 관점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가 등단작 「문예 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조선 일보』, 1934. 4. 21.~4. 22.]에서 매튜 아놀드의 '몰이해적 관심'을 앞세우며 문예 비평의 의미를 규정한 것만 보아도 그들이 끼친 영향력을 헤아릴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김환태는 자신의 비평이 나아갈 방향을 뚜렷하게 표방하였다.
"문예 비평이란 문예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입니다. 따라서 문예 비평가는 작품이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하여야 합니다."
비평이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므로, 비평가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비평가는 상상력과 작품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작가가 창조한 작품의 질서를 찾아내어 의의를 재질서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말하는 '재구성적 체험'은 세계를 인식하여 종합적으로 구성하는 능력인 상상력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사실과 함께, 작가를 개성이 뛰어난 천재로 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천재로서의 작가는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활동하는 자기 목적적 태도로 작품에 전력한다. 그것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 '무목적적 목적성'으로, 세상의 어떤 티끌도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행위에 비견된다. 이 점이 김환태가 동심을 자주 끌어들인 동기이고, 비평가로 하여금 주관에 철저하기를 권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순수한 주관은 일체의 환경적 요인을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순수한 객관과 상통한다. 모름지기 예술의 객관성은 세련된 주관성으로 구체화되는 법이다. 이로써 김환태에서 비롯된 인상 비평이 탄생하거니와, 그것이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인상의 서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판명된다.
김환태는 카프의 생경한 집단 비평을 멀리하였다. 그가 주창한 인상 비평은 작가의 천부적 능력을 고평하므로 비평가의 영도성이 설 자리를 잃는다. 카프 비평가들은 작품에 대한 비평적 애정보다는 정치적 관심으로 일관하며 영도적 위상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비평의 실천적 측면은 소홀히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또 카프 비평가들은 작가나 작품의 개성을 인정하는 대신, 객관적 조건을 강요하며 집단의 정서를 형상화하도록 강요하였다. 김환태가 주관적 인상 비평을 내세웠던 배경에는 비평의 과학화를 부르짖었던 카프 비평가들에 대한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김환태는 예술 지상주의자였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나는 예술 지상주의자"[「여(余)는 예술 지상주의자」]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인생과 예술을 사랑하면서 생활과 문학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한사코 예술의 계몽성과 선동성을 물리친 것은 비평적 신념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작가가 정치에 관심을 쏟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문학적으로 수용되지 않으면 철저히 거부하였다. 문학은 작가의 개성에 기반한 자유의 정신이 표현된 것이기에 정치적 목적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동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환태의 인상 비평은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지 않는 카프 비평에 대한 대항 논리이면서 자신의 비평적 신념이었다.
[심리적 치유의 공간 무주]
고향은 낭만주의자들이 창안한 장소이다. 고향은 부모처럼 주체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향을 어머니처럼 여기는 것은 이와 같다. 고향은 주체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는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고향을 떠나 살아가면서 곤란에 처하게 되면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고향을 떠올린다. 곧, 주체의 귀향 의지는 불안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그가 고향을 호출하는 것은 존재의 불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김환태에게도 고향은 그와 진배없다.
"어느 해 여름 방학에 나는 큰 괴로움을 안고 고향에 돌아갔었습니다. 예전 놀던 산으로 시냇가로 싸다니었으나 나의 괴로움은 좀처럼 멎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적성산에 올라가서 그곳 절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새워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 산이 서러운 어린애로 하여금 눈물을 닦고 웃으며 일어서게 하는 그런 어머니의 품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적성산의 한여름밤」]
인용문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김환태의 고향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큰 괴로움"을 잊고자 적성산에 올랐다. 그 산은 "어머니의 품"이므로, 그는 당연히 "서러운 어린애"가 된다. 그가 일본에서 얻은 슬픔을 위로받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인 셈이다. 홀로 유학할 정도로 다 큰 사내가 우람한 산 앞에서 한없이 작은 어린애가 될 때, 그는 영락없이 어머니의 다독거리는 손길을 기다리는 소년이 된다. 고향은 식민지의 종주국에서 외국 문학을 공부하는 김환태가 내밀한 사연을 털어놓도록 무장 해제시키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유년기의 시간 속으로 재진입하여야만 누릴 수 있다. 그 경험은 고향을 사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밀이다.
"가을이 되자 나는 머슴을 따라다니며 겨울 먹일 소풀을 뜯어 말렸다. 겨울에는 여물을 썰고 소죽을 쑤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첫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나는 동생을 보던 날처럼 기뻐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이 시절이 나의 가장 행복하던 시절, 내 마음의 고향이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날 때면 그 시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소를 생각한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소가 그립다."[「내 소년 시절과 소」]
김환태는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향을 자주 떠올렸다. 그것은 식민지의 청년이 느끼게 되는 비애일 터이고, 동시에 부모의 품을 떠난 자식의 도리이기도 하였다. 그의 고향 생각은 소를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는 이 산문의 첫머리에 "내 마음의 이니스프리에는 소가 산다"고 적었거니와, 소는 그와 고향을 이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교토에서 만난 정지용과 문학적으로 연결되는 고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압천을 거닐며 시를 논하고 우의를 돈독하게 나누었을 뿐더러, 정지용은 「향수」에서 황소를 등장시킨 바 있다. 즉, 둘은 소와 놀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식민지의 유학생이 겪게 되는 슬픔을 위무받았던 것이다. 그처럼 무주는 김환태에게 심리적으로 위안을 안겨 주는 치유의 공간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김환태가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을 안팎에 알려 준다. 낭만주의자는 시간상으로 과거 시제를 선호하고, 공간상으로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곳은 그가 성장하면서 잃어버린 유년기의 원시적 질서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그는 고향에서 과거적 시간을 체험하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료받아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낭만주의자가 순수한 동심의 회복을 외치는 것은 바로 온전한 세계를 갈망하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김환태가 비평에서 유난히 동심을 강조하고 작가의 천재성을 우위에 둔 것은 전적으로 낭만주의적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김환태의 비평 정신 무주에서 되살아나다]
한국의 근대 비평사에서 김환태가 차지하는 자리는 만만치 않다. 그는 카프 문학이 퇴조하는 전형기에 나타나서 문학의 내적 형식에 충실한 비평을 선보였다. 작품의 문학적 성과를 외면하고 정치적 논의를 앞세운 카프 비평가들과 달리, 작가의 개성을 강조하고 비평의 심미화를 꾀하였다. 그는 카프의 입법 비평이나 재단 비평이 과학을 표방한 주관적 비평이라고 거부하는 한편, 작가의 개성을 비호하는 인상 비평이야말로 순수한 주관에 바탕한 객관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김환태는 습득한 외국의 문학 이론을 실제 비평에 적용하여 자신의 비평적 논리를 실천 비평으로 입증한 이론가였다.
김환태는 문학의 이데올로기화와 도구화를 반대하면서 카프의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의 작품 중심적인 태도는 문학의 형식적 요소에 대한 비평가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예술 지상주의자'로서 작가들의 작품 생산을 후원하는 '예원의 순례자'이기를 자처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작가들에게 특정한 창작 방법론을 강요하며 윽박지르던 카프 비평가들과 차별화를 시도한 김환태의 겸양이 예정한 결과이다. 그의 비평사적 공적은 당시의 여느 비평가들보다 선진적인 문예 이론을 앞세워 비평의 예술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였던 김환태의 비평 정신은 현재 무주군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해마다 무주군에서는 눌인 김환태 문학제를 통해 무주 출신이자 한국 비평 문학의 선구자인 김환태의 비평 문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무주군에서는 무주읍 당산리 일원에 김환태 문학관을 건립[2012], 운영하며 그의 비평 문학 세계를 대중들에게 더 깊이, 더 널리 알리고 있다. 한편, 김환태의 비평 문학은 그 정신의 근저에 '무주'가 심리적·원형적 치유의 공간으로 설정된 데서 지역민들에게 큰 위로와 공감을 주고 있으며,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